(한길뉴스 신종식 기자) =

지난 9월30일 석천대제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지례향교를 찾았을 때 “아 너무 멋있구나! 김천에 살면서 이렇게 멋있는 곳을 몰랐을까?”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다른 지역 향교만큼 특출나게 크거나 사찰처럼 웅장한 것도 아니지만 건물의 높낮이가 잘 배치되어 아래에서 본 모습과 위에서 내려다 보는 모습이 각각 다르며 담장 옆에서 내려다 보는 처마와 기와를 보면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지례면 소재지에 다닥다닥 붙은 식당사이로 난 소로를 따라 조금 걸어오르면 장정 둘이 안아야 할 정도로 둘레가 넓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 시골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가 몰래 쥐어주시던 감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거기서 한 발짝만 옮기면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는 솟을대문과 다른 향교에 없는 루각인 사반루(思泮樓)가 이곳을 찾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세월의 인고때문인지 기둥은 곧 쓰러질 듯 힘겨워 함에도 우뚝 솟아 지례면을 내려다 보고 있어 루에 올라서면 절로 흥이 나고 막혔던 가슴도 시원하게 뚫릴 것 같은 느낌이다.

지례향교는 4방3간의 맛배지붕으로 공자를 모신 대성전과 명륜당과 사반루, 그리고 서재로 되어 있으며 대성전 담벼락 옆에서 처마와 기와지붕을 바라보면 지례향교가 얼마나 세심하고 멋스럽게 배치한 건물인지 잘 알 수 있게 한다.

멀리 가을등산을 가는 것도 좋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고장 유적지를 탐방하고 지례흑돼지를 먹으며 가족간 화목을 다지는 것도 풍성한 가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을 것 같다.

지례향교에 대해
문헌이 없어 정확한 연혁은 미상이나 향교는 고려 인종때에 처음 설립되고, 조선초에 전국 군, 현에 설립되었다고 했으나 지례 향교는 어느때에 창설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명륜당 창설기에는 세종 8년에 지례 현감 동래인 정옹이 창건하고 성종 16년에 현감 김수문이 명륜당을 중건하고, 숙종 16년(1690)에 현감 류준광이 교궁을 중수하고, 영조 50년에 사반루를 건립한 것으로 되어있다.
지례 향교는 1913년 김산향교에 폐합 되었다가 유림의 여러차례 진정으로 1920년에 복원되고 6.25동란 때에는 임진왜란 때의 전철을 염려하여 전교 문맹곤, 문명현, 문종덕등이 공자 영정과 27위 성현 위패를 지례면 도곡리 문씨 재실에 봉안하고 삭망분향 하다가 1951년 8월에 천안했다.
1961년 대성전을 개수하고 1988년 군수 김덕배가 명륜당 서재를 보수하고 1990년에 동재를 신축 복원하였다.
지례향교에는 흑판음화의 공자 영정이 봉안되고 있었는데 이 영정은 부항 출신 병마사 이회가 연경에 사신을 수행하다가 돌아오면서 가지고 와서 자기 집에 봉안했다가 1662년에 이석유, 김덕호등 향유가 향교로 옮겨 봉안했는데 1978년에 도난 당하고 지금의 영정은 그뒤에 제작한 것이다.
지례 향교는 임진왜란에 소실되었으나 오성위패는 화를 면했다. 대성전이 화엽에 휩싸였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화엄 속에 뛰어들어 위패를 업어내어 뒷골짝 정결한 곳에 묻어 두었다가 왜병이 물러간 뒤에 대덕면 등고 송씨 정사로 옮겨 8년간 정인향화(정결하게 제 지냄)했다.
. 조선시대의 향교
1) 향교의 성격
서원이 사림들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세워진 사립학교였다면, 향교는 정부가 세우고 지원했던 지방의 사립 중등학교였다. 향교는 오늘날의 공립 중·고등학교로,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보다는 낮은 단계의 교육 기관이었다. 향교는 중앙의 성균관보다는 낮은 학교로서 한양의 사학(四學)과 등급이 같았다.
2) 향교의 교육내용
원래 향교가 세워진 것은 지방에 유교 이념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교육 뿐 아니라 각종 제사 거행과 향촌의 교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부, 목, 군, 현에 각 하나씩 설치되었고, 학생수도 부와 목은 90명, 군은 50명, 현은 30명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가의 보조가 중단되고 흉년까지 연이어 들면서, 향교의 운영에 큰 지장이 생겼다. 결국 향교는 공교육을 담당하는 교육 기관의 기능을 잃고 점차 돈 있는 지역 유지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명분의 장소로 전락해갔다. 하지만 선비들의 활동과 특권을 보장해 주는 중요한 향촌기구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2. 향교의 생활
1) 교육 교과목
향교는 서원과 동등한 중등 교육기관이었으므로, 배우는 과목도 모두 동일했다. 유교의 경전과 성리학 서적, 그리고 역사와 문학을 배웠으며, 간간히 역법, 산술, 의술 같은 실용 지식도 습득했다. 향교 안에서 학생들이 생활하는 것도 서원과 비슷했다. 선생님과 일대일 문답수업을 받았는가 하면, 각종 행사에 반드시 참석하여 「시도기」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다만 서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향교의 학생들에게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학생들의 출석수와 지방 관찰사의 평가를 기준으로, 우수한 학생은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반면 출석률이 저조하고 성적도 좋지 않은 학생은 학생 신분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3. 향교의 선생님
향교의 선생님은 중앙 조정에서 파견되는 사람들이었다. 조정에서는 문과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교수관(敎授官)’이라는 호칭을 주고 지방 각지의 향교의 교사로 파견했다. 교수관은 ‘교수’와 ‘훈도(訓導)’로 구분된다. 교수는 6품 이상의 직급으로 주나 부처럼 큰 지방의 향교에 부임했고, 훈도는 7품 이하의 직급으로 군이나 현처럼 작은 지방의 향교에 부임했다. 그러나 모든 향교에 교수관을 파견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향교에서는 생원이나 진사 시험에 합격한 자들이 향교의 선생님이 되었다. 이런 향교의 선생님들은 당연히 정식 관리가 아니었고 조정의 녹봉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가르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글공부를 한 선비들은 향교의 선생님이 되려 하지 않았다. 힘든 과거 시험공부를 해서 급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정에 나아가 포부를 펼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결국 향교에는 선생님이 부족했고, 급기야 향촌의 유림들이 나서서 자치적으로 선생님을 임명하고 향교를 운영해 갔다. 그 결과 중앙 정부의 향교도 점차 사립 교육기관으로 변모해갔다.
4. 향교의 학생
향교에는 보통 서당 공부를 마친 16세 이상의 학생이 입학했다. 향교 학생 열 명의 추천을 받고 <소학> 시험을 치러 합격하면, 양반 평민이 차별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또 향교의 학생이 되면 신분 차별 없이 군역을 면제 받았고,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도 동등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과거 시험을 응시하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차별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래서 같은 향교에서 공부한 동학이라 할지라도, 양반의 자제는 소과나 문과에 응시한 반면 평민의 자제는 주로 각종 잡과에 응시했다. 조정의 지원이 뜸해지고 향교 교육의 질이 저하되면서, 향교의 교생 중에는 평민이 많아졌다. 부유한 양반집 자제들이 점차 이름 높은 선비가 운영하는 서원으로 입학하면서, 공교육의 권위를 상실한 향교에는 가난한 평민의 자녀가 많아진 것이었다.
향교는 고려·조선시대 유교교육을 위해 지방에 설립한 관학교육기관으로 ‘교궁’ 또는 ‘재궁’이라고도 하였다. 수도를 제외한 각 지방에 관학이 설치된 것은 고려 이후로서 1127년(인종 5)에 인종이 여러 주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부터 향교가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향교에 적극적인 유학교육의 면모가 나타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교화정책 가운데 근본적인 방법으로 지방민을 교육, 교화할 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392년(태조 1) 각 도의 안렴사에 명하여 향교가 만들어지고, 또 잘 운영되는 정도를 가지고 지방관 평가의 기준을 삼는 등 강력한 진흥정책에 힘입어 성종 때는 모든 군·현에 향교가 설치되었다.
향교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배우는 공간으로서 강학장소인 명륜당이 맨 앞에 배치되고, 그 좌우로 지금 기숙사와 같이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하고 있다. 명륜당 뒤에는 공자와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례를 위한 대성전이 위치하고 대성전 좌우로 동무와 서무가 마주하고 있다. 명륜당, 동무, 서무 및 대성전 주위로 성현 제사와 유생 교육에 필요한 제반 업무를 처리하던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다.
교생의 정원은 부·대도호부·목에 50명, 도호부에 40명, 군에 30명, 현에 15명으로 배당되었으나,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각각 90명·70명·50명·30명으로 증원되어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교수관으로는 교수(종6품)와 훈도(종9품)를 두어 교육을 맡아보게 하고 8도의 지방장관인 관찰사로 하여금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교생이 독서하는 일과를 매월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각 향교를 돌아다니며 교생을 독려하였다.
향교의 재정은 조선 초부터 향교에 주어진 위토 전답에서 거두는 세 외에도 지방관이 나누어준 전곡 및 요역, 그리고 향교에 비축된 전곡의 이자로 충당되었다. 《대전속록》 학전조에는 성균관을 비롯한 주·부·군·현 등에 각각 400결·10결·7결·5결씩을 지급하여 이를 농민에게 소작하게하고 소작료를 받아 재정수요를 충당하도록 하였다.
중기 이후 향교는 점차 무력화되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사학인 서원이 거의 대치하게 되었고, 향교는 지방 양민들이 군역을 피역하는 장소로 전락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이름만 남게 되고 단지 문묘에 대한 제사만을 담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