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상가 주차장변 목련, 오랜 수령 자랑하는 희귀 고목

매년 직지사 찾는 상춘객 맞아 가장 먼저 꽃망울 터트려

직지사 고목 감나무는 학조대사와 연산군 일화로 유명

직지사반시진상법이 낳은 역사적 산물로 보호수지정 필요

김천의 나무이야기-<strong>직지사 상가주차장 목련과 직지사내 감나무</strong>
직지사 상가 주차장 앞 목련나무

봄은 만남의 계절이요 그리움의 계절이다.

사람은 먼 그리움을 가지며 살아간다. 봄이면 제일 먼저 환하게 꽃등불을 밝히며 봄소식을 전하는 나무가 목련나무이다. 목련나무는 그리움을 기억하는 나무이다.

목련꽃은 지구상에 처음으로 꽃등불을 피운 머언 아주 머언 1억4천만년전 지구의 봄을 DNA에 간직하고 있는 꽃이다. 그리움의 기억을 간직한 목련꽃이 대항면 향천리 직지사 상가공용 주차장에서 구석진 한곳에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버스주차장을 앞세워 두고 환한 꽃등불을 밝히며 오는 이 가는 이들을 마중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황악산 직지사의 관문이며 김천의 젖줄인 직지천의 냇물이 낙동강을 거쳐 바다에 이르기를 빌어주었고 아들 낳기를 바라는 아낙네들이 직지사 천불전에 바칠 공양미를 이고 지고 가는 모습도 묵묵히 지켜보았을 목련나무는 수령이 얼마인지는 모른다. 상가에서 대를 이어 식당을 운영하는 한 주민은 적어도 백년이상은 되었을 것이라며 해마다 목련꽃이 필 때면 봄이 오려나보다 싶어 가슴이 설렌다고 한다.

단아하고 환하게 피운 꽃이 아름다워 차를 멈춰 서서 바라보다 나무 밑둥치를 안아보니 내 팔 한 아름이 넘었다.

밑둥치를 안고 하늘을 보니 하얀 꽃잎 사이로 파란 하늘이 얼핏 얼핏 보이며 그냥 높다고만 느껴진다.

직지천변을 따라 조성된 화려한 벚꽃 가로수 속에 오직 두 그루만이 뽀오얀 속살을 드러낸 듯 백목련이 자태를 뽐낸다. 거대한 목련나무를 감상한 후 주변에 자리한 직지사와 직지문화공원, 사명대사공원, 고종의 숨겨진 혈육, 문용옹주가 살았던 방아치마을을 함께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김천의 나무이야기-<strong>직지사 상가주차장 목련과 직지사내 감나무</strong>
직지사 경내 감나무

직지사 경내에도 보기 힘든 수백년 수령을 자랑하는 감나무가 오랜 세월 직지사와 역사를 함께해 왔다. 직지사에는 경내에 짧게는 3백년 길게는 오백년 수령을 자랑하는 감나무가 많은 것이 특징인데 이 감의 진상을 둘러싸고 조선왕실과 일촉즉발의 위기에 까지 이르렀던 때가 있었다. 직지사에서 궁중에 감을 진상하는 직지사반시진상법이 있었는데 이 법이 시행된 것은 조선 7대 세조때 부터였다. 해인사주지로 있던 학조대사가 직지사 주지를 겸하게 된 후 대군으로 있을 때부터 친분이 있던 조선7대 세조에게 직지사에서 딴 감을 몇 개 진상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세월이 흘러 10대 연산군 때까지 이어져왔는데 연로해진 학조대사가 상소를 올려 차후에는 궁궐에서 관리를 보내어 직접 감을 따서 갈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연산군은 학조대사를 벌주려고 하였으나 왕비 신씨가 편지 한 장으로서 학조대사의 뜻을 거두게 했다는 것이다.

역사상 유래없는 폭군으로 기록된 연산군과 달리 왕비 신씨는 현명하고 인자한 국모로 기록되고 있는데 왕비신씨의 지혜로운 대처로 인해 직지사와 왕실의 대립이 원만하게 해결될수 있었던 것이다.

김천의 나무이야기-<strong>직지사 상가주차장 목련과 직지사내 감나무</strong>
직지사 대웅전

직지사는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해발1111m 황악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데 직지사(直指寺)라는 사명(寺名)이 붙여진 배경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나오는󰡒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 즉, 수행을 통해 욕심과 번뇌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자기 자신이 부처요, 그 마음이 곧 불심이라는 선종의 핵심 가르침인 직지인심견성성불의 맨 앞 글자인 직지(直指)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둘째는 창건주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선산 태조산 도리사를 창건한 후 김천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에도 절을 지을만한 훌륭한 터가 있다고 하여 直(곧을직)과 指(손가락지)자를 따서 직지사라 했다는 설이 있다. 아도화상(阿道和尙)은 선산 해평 태조산 도리사를 417년에 신라 최초의 사찰로 창건한 이듬해인 418년(눌지왕 2년)에 직지사를 창건했다. 아도화상은 고구려의 승려로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선산 해평면 모례(毛禮)라는 사람 집에 숨어 살았는데 마침 신라왕녀가 병이 난 것을 향을 피워 고쳐준 인연으로 신라 왕실로부터 포교를 묵인 받고 도리사와 직지사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직지사는 918년 고려의 건국과 함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927년 견훤이 경주를 급습하자 경애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사1만으로 경주로 향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대구 팔공산에 진을 친다. 맹장 견훤은 이를 간파했고 역습을 당해 대패한 왕건은 남은 군사 2천을 수습하여 구미 인동현까지 밀리고 말았다. 이때 휘하 장수의 권유로 직지사의 능여조사(能如祖師)를 만나게 되고 능여는 왕건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급히 퇴각하는 과정에서 신발도 신지 못한 군사들에게 짚신 2천 켤레를 삼아주고 큰 짚신을 만들어 사방에 흩어두는 심리전을 구사하여 왕건이 불리한 전세를 만회해 개경으로 귀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오늘날로 치면 3백만 평에 달하는 전답과 임야 1천결을 직지사에 내려 은혜를 갚았고 4대 광종때까지 매년 전답 10결과 노비를 하사했다.

유교를 국시(國是)로 하였던 조선이 건국되면서 전국의 불교는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지만 직지사는 제2대 임금인 정종의 즉위 원년(1399)에 어태(御胎)를 직지사의 북봉(北峰)에 안치함과 더불어 선종 대가람으로 인정받아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계속 사세를 지킬 수 있었다. 정종의 어태가 안치됨에 따라 직지사의 소속현인 김산현(金山縣)이 김산군으로 승격되었고 전답 15결과 노비10인을 하사받고 금표와 원당을 세워 태실을 수호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54년 본산제도가 개편되면서 25본산의 하나로 들고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로 승격하여 김천, 구미, 상주, 문경, 예천 등 5개 시군의 54개의 말사를 거느린 대찰(大刹)로 발전했다.

직지사 전각중 가장 유명한 비로전내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노사나불을 모시고 14개의 나무계단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천불 중에서 현재의 천불을 신앙하는 천불을 모시고 있다.

임진왜란 때 천불 중 295구가 분실되었던 것을 정조9년(1785) 다시 보완했는데 아들 낳기를 염원하는 참배자가 법당에 들어가서 참배할 때 첫눈에 바로 이 동자상이 보이면 아들을 낳는다고 전해진다. 천불전은 직지사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불전으로 예부터 신혼부부를 비롯하여 아들낳기를 염원하는 부녀자들이 많이 찾았던 명소이다.

사명각(四溟閣)은 고승 사명대사의 영탱을 모신 곳으로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사명대사는 16세에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대사의 제자가 된 이후에 30세에 본사의 주지를 역임했고 임진왜란 때 호국선사로서 큰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별도로 독립된 건물에 영탱을 모시고 있다.

직지사는 예부터 사두혈(蛇頭穴)의 명당 터로 알려져 왔는데 조선2대 정종의 태실이 1399년 대웅전 뒤의 북봉에 안치된 것은 이 같은 풍수지리에서 기인된 것이다. 북봉은 황악산의 산줄기가 뱀의 허리처럼 길게 내려뻗다가 뱀이 머리를 치든 것처럼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하여 기가 드센 사두혈의 길지로 알려졌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시대에서도 직지사는 정종의 어태(御胎)를 관리하는 태실수호사찰로 지정되어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고 작은 현에 지나지 않았던 김산(김천의 옛이름)이 김산군으로 승격한 요인도 정종태실로 인하여 가능했다. 정종은 자신이 즉위한 원년에 다른 곳에 안치되어 있던 태실을 사두혈의 명당으로 이름난 직지사 북봉으로 옮겨 안치했는데 숭유억불을 국시로하여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왕실에서도 임금의 태를 모셨고 태실을 관리해야할 책임이 주어진 직지사를 보호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실과 직지사의 보호를 받으며 보존되어 오던 태실은 1928년 태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총독부의 명분아래 파헤쳐져 태항아리만을 꺼내어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전되고 현재 태봉 정상에는 석물 여러기가 흩어진 채 방치되어 있다. 또 태실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던 중동석은 극락전 앞 잔디밭에 옮겨져 있고 8개의 울타리석 중 2개가 성보박물관 앞에 남아있다.

정종의 어태가 안치된 태봉 바로 아래에는 개구리봉으로 불리는 또 다른 야산이 자리잡고 있다. 이 개구리봉은 인동장씨 집안 소유로 원래 태봉과 붙어있던 산이었으나 지금은 두 개의 산으로 독립되어 있는데 그 사연이 흥미롭다. 1952년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택상의 부친 장승원은 구미 인동의 대부호로 일찍이 명당으로 소문난 태봉 사두혈 인근의 개구리봉을 묘자리를 잡아놓았다. 사후에 후손들이 이곳으로 장지를 정하고자 지관을 보내어 살펴보게 했더니 가히 천하의 명당은 분명하나 사두혈은 뱀을 상징하고 개구리봉은 개구리를 상징하니 서로 상극인지라 개구리봉에 산소를 들이면 후손이 발복하기 힘들다 하며 2가지의 방비책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태봉의 사두혈 기운이 개구리봉으로 흘러들지 못하도록 산줄기를 파내어 두 개의 독립된 산으로 만들고 뱀이 개구리를 해하려 할 때 개구리가 도망칠 수 있는 피난처로서 물을 담는 저수지를 만들어야 한다하여 그대로 하였다는 것이다.

직지사 금강문에는 남편을 그리워하다 죽은 한 여인의 애절한 전설이 전해져 온다. 옛날 떠돌이 승려가 경남 합천 땅의 마을 촌장의 집에 시주를 받으려고 들렀는데 그 집의 무남독녀 딸이 스님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거이다. 딸을 살리기위해 아버지는 스님을 기두었고 마음에도 없지만 여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혼인을 하여 처가살이를 하였는데 아들이 태어나자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아내는 아들과 자신을 두고 떠나지 않을 것으로 믿고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목탁과 가사, 장삼을 내주었다. 이를 받아 쥔 스님은 다시 불심이 발동하여 야반도주를 하였고 전국을 수소문 하던 아내는 남편이 김천 직지사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합천에서 아들을 업고 여러 날을 달려오다가 지금의 금강문 자리에서 아들과 함께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부터 매년 부인이 죽은 날이 되면 직지사 스님들이 한사람씩 불려 나가 부인이 죽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고 다급해진 절에서는 부인의 원한을 위로하고자 그 자리에 사당을 지어 해마다 기일에 맞추어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어느 해 인가 도력이 높은 고승이 직지사를 찾았다가 제사지내는 광경을 목격하고 크게 나무라며 금강역사를 모신 금강문을 지어 여인의 원귀를 쫒아내라고 하여 금강문이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직지사 금강문과 천왕문 중간에는 넓직한 돌 하나가 덩그러니 벚나무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돌이 임진왜란 때 의승병을 조직하여 왜병을 물리치고 종전 후 일본으로 건너가 수천에 달하는 조선포로들을 구출해오는데 기여해 호국선사로 알려진 사명대사의 출가와 인연이 있는 유명한 돌이다. 사명대사(1544-1610)는 경남 밀양 태생으로 풍천임씨(豊川任氏)이며 속명은 응규(應奎), 법명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13세 때에 김천에 은거하고 있던 황희의 현손인 황여헌(黃汝獻) 문하에서 과거공부를 하다가 15세 때에 모친을 여의고 16세 때에 부친을 여의게 되자 공부에 뜻을 접고 방황을 거듭한다. 직지사에 놀러왔다가 은행나무그늘아래 돌을 발견하고 앉았다가 낮잠이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에 대웅전에서 참선을 하던 주지 신묵대사도 낮잠이 들었다. 신묵(信黙)은 꿈에 황룡이 나타나 천왕문앞 은행나무를 감싸고 있는 꿈에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그 자리로 가보니 한아이가 돌위에서 잠이 들어있었고 양친을 여위고 괴로워하던 소년은 신묵에게 출가를 소원하니 신묵은 자신의 꿈에 본 황룡임을 직감하고 아이를 거두어 제자로 삼았다.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대사의 제자가 된 소년은 18세에 승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30세에 신묵의 뒤를 이어 직지사 주지가 되었다.

사명당은 32세에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로 사명대사 휴정(休靜)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승병을 조직해 승병장으로서 명승을 떨쳤다.

한길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