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현) = 성과 없는 햇볕정책
6•25사변은 망각하지 못할 민족의 대 비극이다. 이 가슴 아픈 역사 앞에 옷깃을 여미며 소중한 젊음을 초개같이 던져 풍전등화 같이 위태로운 조국수호를 위해 산화한 국군 용사와 공산주의의 불법 침략에 항거 위기에 처한 우방을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친 수많은 참전희생 용사들의 숭고한 영전에 고개 숙여 명복을 빌고 싶다.
6•25사변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를 기점으로 38도선 전역에 걸쳐 선전 포고도 없이 기습적인 남침을 감행 동족상잔의 비극을 자행한 북괴의 살인 만행이었다.
그로부터 3년 여의 참혹한 전쟁으로 우리는 상상을 불허하는 인명과 재산을 잃게 되었고, 강산은 폐허가 되었다.
악전고투 끝에 이 땅에서 적군을 물리치고 소중한 자유를 뒤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도 그들은 호시탐탐 적화통일의 침략적 야욕을 포기하지 않고 한편 남북협상을 통해서 교활한 이익 챙기기에 혈안이 된 음흉한 이중적 면모를 지닌 집단으로 남아 있다.
소위 햇볕정책이라는 명분 아래 그동안 일방적으로 입은 막중한 은혜에 보답은 커녕, 비밀리에 핵폭탄을 만들어 왔고, 1년전 6월29일 서해를 통한 기습공격을 감행 우리의 꽃다운 장병의 목숨을 앗아간 천인공로할 엽기적 살인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사변이후 그 수치를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의 무수한 도발을 감행한 바가 있거니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김신조의 청와대 기습사건, 미 정보함 푸에부로호 납북 사건, 현충문 폭파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아웅산 폭파사건 등 지면상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북괴의 관행적인 도발이 한 맺힌 6•25를 전후해서 책동되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과거 만행에 대한 적절한 사죄 대신 재침야욕의 날카로운 이빨을 과시한 악랄한 메시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는 도덕불감증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대응에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인상에 우려되는바 적지 않다. 현실을 외면한 상황인식의 편향성에서 벗어나 합리적 사고의 전환이 시급함을 느낀다.
예컨대 현재의 햇볕정책은 미친개의 목에 방울 달기식의 무모한 발상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되며 소기의 성과 없이 국익 손실만 초래할 개연성이 우려된다.
따라서 상황 판단에 입각한 냉정한 성찰에 필요성을 역설 하고 싶다. “햇볕정책은 가뭄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 경우 햇빛은 작물을 고사 시킬 우려가 있다”라는 말에 귀 기울어 주었으면 한다.
방공구호 보다 친공구호가 많은 사회
요즘 젊은이의 대다수는 6•25사변의 비극적 북괴의 만행에 관해서 거의 눈뜬장님처럼 아는 것이 없다.
따라서 기습적인 북괴의 악랄한 만행 앞에 속수무책으로 희생만 당하고 있을 때 미국을 위시한 우방의 도움이 얼마나 절실했는가를 잘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미국은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우리의 위기를 도와준 우방중의 우방이다. 그때 희생된 미국의 젊은이가 약 3만 명이라는 집계가 나와 있으니 이 엄청난 희생엔 무엇으로 보답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다.
그때 희생된 젊은이의 부모님들은 자식 잃은 그분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상상을 초월하리란 느낌이 든다. 아마 그 후유증으로 가슴 쥐며 뒤이어 사망한 부모님도 많았다는 후문이어서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이 헛말은 아닌듯하다.
혹자는 그들 나라를 위해서 이 땅에 와서 싸우다 전사한 것일 뿐이라며 그들에게 고맙게 여길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아전인수적격 이기적 발상이며 크게 잘못된 편견이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방을 위해서 목숨을 헌신짝 같이 버린 것이다. 이런 경우 남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그 숭고함은 어떠한 비유로도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
남을 위해서 목숨 바치기란 어려움 중의 어려움인 것이다. 귀중한 재화는 혹 남을 위해 희사할 사람이 있을지라도, 자기의 목숨을 희사하겠다고 선뜩 나설 사람은 그 누구도 없지 않겠는가?
명분 약한 반미 촛불시위
우리에게 적과 참다운 우방을 구별하지 못하는 풍조가 그 어느 때부터 인가 이 땅에 만연하게 되었다. 적을 적이라 보지 않고 우방을 우방으로 보지 않는 풍조는 예컨대 보석을 보석으로 보지 않고 깨진 유리조각을 보석으로 여기는 어리석음과 도 같아서 정상적 분별심이 결여된 상태이거나 아니면 정신병의 시초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경우 교육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여중생 사망으로 인한 촛불 시위는 방공교육 결여에서 온 생생한 실례라고 볼 수 있다. 방공 교육이 제대로 되었다면 촛불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논리는 현실성이 충분하다.
만일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북괴 남침입시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서 약 3만명의 미군 이 전사한 사실하나만이라도 정확하게 교육했더라도 미군의 군사훈련 도중 희생된 두 여중생의 사망을 두고 그렇게 격렬한 반미시위로 까지 진전되지 않았을 것이란 논리에는 타당성이 있다.
그들의 군사훈련 역시 우리나라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훈련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가일층 이 논리의 이해는 쉬워진다. 그러나 이 당위성이 희박한 시위를 선동적으로 주도한 기성세대의 사상에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질 뿐이다.
공산주의 선동 방법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방법으로 제대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순수한 젊은이의 판단을 왜곡시키는 행위야 말로 크게 비난 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수많은 젊은이를 희생시켜서 까지 우리를 돕기에 주저하지 않고 달려온 미국이 촛불 시위를 보고 있는 시각은 촛불 시위자들과는 너무나도 상반된다.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고마움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라는 것이 미국사람들의 시각이라는 것이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필자의 누이동생의 전언이다.
대한민국은 상종 못 할 나라라는 것이 대다수 미국국민의 여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의 생명관은 대한민국의 땅덩어리 10개를 준다 해도 그들이 6•25때 희생된 약 3만명의 생명과 바꾼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일에 관련하여 우리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할 과오를 범한 듯하다. 더욱이 미국까지 가서 항의성 시위를 벌리는 무례까지 범하였으니 말이다.
법과 원칙을 존중하는 미국에서 우리의 도덕적 평가는 과연 어느 정도가 될지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군사훈련 중 발생한 과실치사는 현재 미국 법의식에 준한다면 무죄를 판결한다는 것이 여동생의 말이었다.
우리의 과잉대응에는 미국인들의 혀를 내 두르게 했다는 것이며 또한 이런 문제를 묵인•방조한 정부의 책임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 미국인들의 시각이라는 것이다.
그 실례로 북괴의 서해 침공을 규탄하는 시위다운 시위는 대한민국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미국인들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서해 도발에 대한 책임은 묵인하는 대신 촛불시위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보다 복잡한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인다.
그것은 전술한 적을 적으로 보지 않고 우방을 우방으로 보지 않는 왜곡된 시각과 함께 친공세력의 결집력을 과시하려는 자들의 주도 아래 면밀하게 계획된 방공 와해작전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 필자의 시각이다.
다시 말하면 방공세력의 기를 꺾기 위함이오. 햇볕정책을 표방하여 친공세력의 세를 확장하려는 의도아래 중도세력의 지지를 결집하려는 책동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햇볕정책이 어떤 이유로 친공세력을 묵인하여 방공세력의 퇴조를 불러오게 하였을까? 이는 친공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명분에 약점이 있음으로 보이나 베일에 가려진 문제여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6•25는 끝난 전쟁이 아님을 잘 알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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