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호) = <칼럼> - 송승호 교수의 김천사랑이야기(3) - 65년 전 부모님의 결혼“에휴! 니들 아버지는 나한테 모든 것을 맡겨두고, 먼저 가셨으니…”

어머니의 탄식입니다. 지난 1월 25일 어머니를 뵙기 위해 김천의 한신아파트를 찾았습니다. 어머니는 뜻밖에 “오늘이 니들 아버지와 결혼한 날”이라시면서, 긴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5년 전인 1949년 12월6일(음력) 두 분께서는 부부의 연을 맺으셨습니다.
당시 어머님은 18세, 아버님은 22세셨습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님은 제가 대학 4학년 때인 1986년 향년 59세의 나이로 너무나도 일찍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두 분의 결혼식은 어머니께서 태어나고 자란 김천시 남면 운남리(일명 종상골)에서 치러졌습니다.
어머니는 1년 뒤인 1950년 11월2일(음력) 시댁인 김천시 아포읍 송천(하송)으로 신행을 가셨구요. 신행갈 당시, 어머니는 4인 가마를 타셨고, 소달구지에 쌀 4가마와 돗자리 등을 가득 싣고 가셨다고 합니다.

두 분은 결혼식을 올리신 뒤, 몇 개월만에 6.25사변을 당하셨습니다.
당시 외가 가족들은 외가(종상골) 인근의 일명 솔방천이라는 곳으로 임시 피난을 가셨구요.
외가에는 폭탄 3발이 터져 안채와 사랑채 등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합니다.
인민군들은 외가의 마당에 솥과 냄비를 걸어 놓고 밥을 해먹으로면서 상당한 기간 동안 외가집을 점거했습니다.
당시 외가에는 소가 4마리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이 소를 인민군 몰래 데리고 나와, 친가인 아포읍 송천동 뒷산에 숨기는 바람에, 소는 지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깊은 주름과 굽은 허리를 보면서, 한없는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월을 탓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격동의 세월인 1950년대를 살아오신 우리들의 부모님 세대들은 모두 이 같은 전쟁의 참혹상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전쟁 이후 세대인 우리들은 부모님 세대와는 달리, 큰 어려움 없이 오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럽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추운 날씨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입니다.
이 추운 겨울, 우리들의 부모님들께서 무사히 겨울을 나시도록 각별한 보살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닯다 어찌하랴.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정철 선생)

저도 오늘 많은 반성을 합니다.


◇ 프로필
– 김천시 아포읍 출생(52세)
– 김천초등·성의중·김천고교·부산대 경영학과·동아대 대학원(정치학 석사)졸업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특임교수(현)
-김천희망포럼 위원장(현)
-TV조선, YTN, MBN, 채널A, 연합뉴스y 등 정치평론가 활동 중
-한국산업인력공단 상임감사(전), 한국폴리텍대학교 감사(전) 등 역임
-제18대·19대 국회의원 선거 김천지역구 예비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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