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립고 그리운 아버님
(송승호) =

<칼럼> - 송승호 교수의 김천사랑이야기(9) - 아버님의 빈자리〈어버이 살아실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이신 송강 정철 선생의 시조입니다.
정철 선생은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 이외에도 1백여 수의 시조 등 주옥과 같은 작품들을 남기셨지요.

아버지!
자식들의 영원한 버팀목인 동시에 가장 위대한 스승일 수밖에 없는 대상이 바로 우리들의 아버님들이신 것 같습니다.
책상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오늘따라 유독 저도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나네요.
<칼럼> - 송승호 교수의 김천사랑이야기(9) - 아버님의 빈자리


저의 아버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셨습니다.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어버님은 갑자기, 정말 갑자기 저희들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님은 당시 연세가 쉰아홉에 불과하셨습니다. 구성면에 있는 대성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 중이셨죠. 오른쪽 허벅지 뼈가 약간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수술이 간단히 잘 끝났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 1주일 입원을 하신 뒤, 퇴원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님께서 퇴원하시기 이틀 전 서울의 병원에서 어버님과 함께 밤늦도록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저는 졸업식 준비를 위해 대학교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 갔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습니다. 서울의 병원에서 큰 형님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님께서 잘 퇴원하셨다는 얘기일 것이라는 생각에 가볍게 전화를 받았지요. 『아버님께서 위독하시니, 빨리 서울로 올라 와라』 그날 이후 아버님께서는 중환자실에서 20여 일 동안 사경을 헤매시다가 끝내 우리들의 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천붕지통(天崩之痛)」, 하늘이 무너질 때 느끼는 아픔이라는 한자 숙어 그 자체였습니다.
그날 이후 제 삶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대학원에 진학을 해서 교수의 직업을 가지려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님의 100일 탈상을 위해 매주 김천을 오르내리던 어느 날, 어머님과 형제들에게 상의도 하지 않고 언론사 공채시험에 응시를 했죠.
그로부터 또 몇 일이 흐른 뒤, 아버님의 제사상에 시험 합격을 알리는 전보가 올리어져 있었습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신문기자로서의 인생은 이렇게 시작되었지요.

제 나이 오십을 넘기도록, 단 하루도 아버님께서 제 가슴을 떠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저는 양친 모두 생존해 계신 친구들이 가장 부럽습니다.
◇ 프로필
– 김천시 아포읍 출생(52세)
– 김천초등·성의중·김천고교·부산대 경영학과·동아대 대학원(정치학 석사)졸업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특임교수(현)
-김천희망포럼 위원장(현)
-TV조선, YTN, MBN, 채널A, 연합뉴스y 등 정치평론가로 활동 중(현)
– 부산매일신문 정치부장·월간조선(조선일보사) 취재팀장
-한국산업인력공단 상임감사, 한국폴리텍대학교 감사 등 역임
-제18대·19대 국회의원 선거 김천지역구 새누리당 예비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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