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청와대-각료 전면물갈이하라
<프레시안 제공>
(박태견편집) = 노무현 대통령이 10일 “국민의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정확히 대통령 취임 일곱달 보름만의 일로, 한국 정치사상 초유의 충격적 사태전개다.
노 대통령의 이번 선언은 대다수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난번 대선때 노대통령을 지지했던 국민이든, 반대편 후보를 지지했든 국민이든 간에 모두에게 ‘충격’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선언이다. 아울러 지금 노대통령의 통치방식에 불만을 느끼는 국민이든, 그렇지 않은 국민이든 간에 모두에게 충격적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재신임 발언’을 접한 대다수 국민이 우선 느끼는 감정은 ‘허탈함’일 것이다. 아울러 나라의 앞날에 대한 암담한 ‘걱정’도 함께 느낄 것이다.
‘이 나라가 도대체 앞으로 어디로 흘러가려는가…’
국제사회의 시각도 마찬가지인듯, 각국 언론은 이 소식을 ‘긴급 속보’로 전세계로 타전하고 있다. 한국정치가 심각한 위기국면에 진입하고 있다는 해설을 덧붙여서…
“그동안 축적된 ‘국민들의 불신’에 대해 재신임 묻겠다”
노대통령의 이날 재신임 발언을 끝까지 읽어보면, 노대통령의 최측근인 최도술씨의 비리 의혹이 재신임 결심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노정권의 마지막 생명선인 ‘도덕성’을 의심받게 된 만큼 국민의 재신임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상황인식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면, 보다 근원적으로는 ‘국민 불신’이 근원적 동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사가 끝나면 그 결과가 무엇이든 이 문제를 포함해 그동안 축적된 ‘국민들의 불신’에 대해 재신임을 묻겠다.”
‘국민 불신’에 대한 노대통령의 마음고생이 대단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도 그럴 것이 노대통령 지지도는 취임후 내리 곤두박질쳐 통계 전문가들이 ‘정권유지 마지노선’으로 일컬어지는 30% 붕괴까지 위협받는 상황이다. 특히 이같은 지지도 하락은 정권말기도 아닌 정권초기에 나타났으며, 멈추지 않고 부단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노대통령에게는 커다란 심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하야’후 예상되는 정치 아노미
이처럼 노대통령의 그동안 말못할 고뇌가 충분히 이해가면서도, 과연 대통령의 선택이 ‘재신임’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이 든다.
‘재신임’을 묻겠다는 것은 국민들이 계속해 ‘불신’을 해소하지 않을 경우 대통령직에서 ‘중도 하야’하겠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하야’ 이후의 정국을 상상해보자.
헌법 제68조 2항은 “대통령이 궐위된 때 또는 대통령 당선자가 사망하거나 판결 기타의 사유로 그 자격을 상실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의 ‘하야’란 이 조항의 ‘궐위(闕位)’에 해당한다.
과연 현재의 어지러운 정국구도를 볼 때 ’60일 이내’에 졸속으로 차기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을 것인가. 또 만에 하나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차기대통령을 선출한다 할지라도, 과연 그 대통령은 순탄하게 통치를 해나갈 수 있을까. 더욱이 지금처럼 북핵문제, 경제문제, 이라크파병 문제 등 분초를 다투는 다급한 현안이 산적해 있는 중차대한 상황에서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몇년간 한국은 전례없는 미증유의 정치적 혼란을 경험하고, 이 과정에 한국은 회복불능의 나락의 늪으로 곤두박질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상황이 훤히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유사시 하야’를 전제로 한 재신임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대목은,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무책임하다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민심 이반은 조중동 때문이 아니다
특히 노대통령이 언급한 ‘축적된 국민들의 불신’에 대한 대응이 ‘재신임’이어야 하느냐에 대해선 더욱 혹독한 노대통령의 자아비판이 필요해 보인다. 대통령이 과연 ‘축적된 국민들의 불신’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은 더없이 슬기로운 국민이다. 대선때에는 계층적 이해관계뿐 아니라 보혁갈등, 지역갈등 등 모든 요소가 작용해 더없이 치열한 국론분열을 경험한다. 하지만 일단 선거가 끝나면 대다수 국민이 힘을 모아 새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어왔다. 노대통령 당선 이후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노대통령에게 쏠렸던 기대는 빠르게 허물어져갔다. 조중동을 비롯한 국내외 기득권세력의 부단한 공세가 한 요인이 됐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더 근원적 원인은 노대통령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노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든 유권자들은 지난 대선때 조중동 등 기득권세력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던 ‘뚜렷한 관점’의 국민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노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많은 유권자들은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조중동 때문이 아니다. 노대통령의 ‘국정’이 원인이다.

지금 국민분노는 폭발직전
퇴근후 일반시민들이 자주 찾는 음식점이나 상가를 둘러보면, 누구를 향한 ‘말못할 분노’가 절로 치솟을 정도로 참담하기 그지 없다.
음심점에는 한두 테이블밖에 손님들이 없고, 어떤 곳은 손님이 전혀 없는 곳도 즐비하다. 옷가게에는 ‘점포정리 세일’ 문구가 덕지적지 붙어있다. 시내 곳곳에는 빈 택시들이 즐비하다. 어느 한 곳을 둘러봐도 멀쩡한 곳이 없다.
예외없이 하는 말이 “IMF때보다 지독하다” “매출이 최소한 30%이상 줄었다” “앞으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자신없다”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또하나 있다. “정부는 아파트 투기 하는 놈들 안 잡고 뭐하는지 모르겠다”이다. 대다수 서민이나 샐러리맨은 허리가 휘청거리는데, 상류층에서는 ‘세기말적 투기’가 진행되면서 몇억, 몇십억의 불로소득을 챙기는 모습을 방치하고 있는 정권에 대한 극한분노다.
이뿐이 아니다. 외세의 식민주의적 이라크 파병요구에 대한 정부의 소심한 대응이나, 위도 핵폐기장 사태에서 볼 수 있는 개발독재적 접근방식, 공교육 황폐화-사교육 팽창에 대한 정부의 외면 등 노무현대통령에게 걸었던 많은 기대가 계속해 무너져 내렸다.

노 대통령이 언급한 ‘축적된 국민들의 불신’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다.
참모-각료 전면사퇴하라
이같은 국민불신에 대한 대응은 따라서 국민들의 신뢰를 되찾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어야 한다. 노대통령이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우선 국민불신을 초래한 주요 원인제공자인 문제 각료들과 청와대 참모진을 전면교체해야 한다. 아니, 대통령이 교체하기에 앞서 해당 관료와 참모들은 자진사퇴해야 한다. 자신들이 모시던 대통령이 ‘재신임’이라는 극한선언까지 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린만큼 이들은 물러나야 마땅하다.
그후 대통령은 ‘초심’으로 돌아가 국민불신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읽고,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인물들로 새 팀을 짜 ‘재신임’을 받는 날까지 최선을 다한 뒤 국민의 재신임을 받아라.
아울러 기존 정치권과, 정치권 물갈이를 주장하는 신진 정치세력도 매일같이 ‘정치개혁’ 운운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는 그만 두고, 지금 ‘국민불신’ ‘국민분노’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읽고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뒤 국민 심판을 받을 준비를 하라. 언제까지 정치놀음만 계속할 것인가.
통치는 하다가 짜증이 나면 집어치워도 되는 ‘아이들 소꼽장난’이 아니다. 4천7백만 국민의 생존권이 달린 사안이다. 정 못하겠다면 재신임을 물을 필요도 없다. 차라리 곧바로 물러나라. 하지만 대통령의 ‘중도 하야’는 그렇게 쉽게 입에 담을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이같은 정치혼란의 와중에 가뜩이나 위태로운 나라가 회생불능의 치명상을 입을 위험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정말 탄식이 절로 나오는 2003년 10월1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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