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당선자의 여섯가지 勝因
(이진) = 이번 대통령 선거는 노무현 당선자가 주장해 왔던 자신의 집권 비전, 곧 “문화 혁명”의 시발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스트 3김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이번 선거에서 기존의 관행을 타파하는 새로운 형태의 캠페인이 여럿 선보였고, 그것들은 모두 주요했다. 또 변화한 국민의 새 패러다임을 이회창 진영과 노무현 진영이 다르게 읽고 있었다는 것도 두 후보의 당락을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국민이 변했다
노무현 당선자는 17일에 가졌던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국민이 제게 호응했거나, 제가 국민들에게 호응했거나” 둘 사이의 상호 호응 작용 때문에 정치 문화가 바뀌었다고 주장했었다. 투표가 치러지기 전이었지만 그가 국민에게 얼마나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는지는 그의 얼굴 표정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상호간 감성 교류(?)는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지난 4월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승리했을 때, 한 전략 연구원은 “노무현은 이 시대 국민이 좋아하는 상품”이라고 분석했었다. 한 사회의 경제적 지위가 문화를 이끌어내고, 그 문화가 정치인을 낳는다는 것이었다. 노 당선자가 줄곧 주장했던 ‘수평적 리더십’은 서구 리더십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발달된 사회의 인간관계에 효율적인 리더십이었고, 격의 없는 말투와 행동은 권위주의에 염증을 느끼는 젊은 세대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사안에 대한 진위를 가리는 국민들의 정치 의식이 성숙해진 것도 한몫 했다. 수건돌리기, 돈 봉투 돌리기 등 금품이 ‘약발’을 받던 시대는 돈이 필요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젠 소위 ‘먹고는 살 만한 때’라는 것이다. 물질보다 정신적인 만족에 더 필요를 느끼는 이들의 욕구가 커지기도 했다.
노무현 당선자의 약력은 유권자들이 보기에 매우 ‘깨끗한’ 것이었다. 부정부패에 연루된 것이 없고, 한 길을 걸었다는 것도 어필했다.
미디어 선거
노무현 대 이회창의 대결이 아니라 노무현 대 거대 언론과의 대결이라 할 정도로 이번 선거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것은 미디어 대결이었다. “조중동 대 반 조중동 만 있을 뿐 진정한 언론은 없다”고 개탄하던 한 언론사 정치부 기자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언론사들 중 여러 곳이 노골적인 편향성을 드러내었던 이번 선거는 앞으로 언론계에 많은 변화를 예고한다.
노 당선자는 92년 주간 조선이 노 당선자의 재산 관련 허위 보도를 한 사실에 대한 피해의식이 짙다. 당시 권양숙씨는 “도대체 (기사를 썼던 기자가) 어떤 사람인가 보려고 처음으로 법정에도 가 봤다” 할 정도로 당혹스러움과 억울함을 가지고 있다.
노 당선자는 “내가 원하는 것은 공정보도입니다. 나를 잘 써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는 말로 자신의 불편한 심경을 토로하곤 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사회적으로 거세게 일어난 안티 조선 운동도 일반인들의 미디어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에 영향을 미쳤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노무현 당선자가 캠페인 초기부터 참모들에게 중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인터넷 이용’이었다.
노 당선자가 인터넷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는 월드컵과 붉은 악마 현상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잘 드러난다. 붉은 악마 현상을 각계 저마다 여러 형태로 분석하고 있는 와중이던 7월 초, 그 현상이 왜 일어났다고 보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대해 노 당선자는 인터넷을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았다.
“인터넷에 의해 수많은 커뮤니티가 생겼고, 하나의 공감대가 생기자 자생적인 동원 체제가 생긴 것이다. 환경이 그렇게 만든다. 7백만 명이 길거리에 나와서 볼 수 있는 전광판, 이게 새로운 문화이다. 전광판이라는 새로운 멀티비전이 요술 거울처럼 거기에 있었고, ‘가자’ 하고 한꺼번에 서로 연락할 수 있는 의사 전달의 통로가 인터넷 커뮤니티 안에 존재했던 것이다.”
노 당선자는 그것을 “새로운 통신 문화”라고 했다. 그리고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그건 그냥 문화의 변화입니다” 했었다. 인터넷이 변화시키는 문화 현상을 읽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론 매체 시장 70%를 점유하고 있는 조-중-동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노 당선자는 대안 매체로서 인터넷을 선택했고, 그것의 효과를 누구보다 확신했다. 캠페인 기간 동안 많은 (자원봉사) 인력이 동원되었고, 노 당선자의 일거수 일투족이 속보성 있게 국민에게 알려졌다. 또 ‘노하우’를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놓아 네티즌들이 자신의 의사를 자유로이 개진하는 과정에서 좋은 캠페인 전략이 신속하게 활용되도록 했다.
캠페인 전략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노 당선자는 캠페인 성공 이유를 두 가지로 분석했다.
“두 가지다. 의사 결정 과정에서 우리는 분권적 의사 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각기 책임을 지고 조언은 받아들이되 자기 책임으로 결정해 가고, 상급 결재 라인이 없었다. 수평적이고 개방적이고 분권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신속하고 유연할 수 있었다.
그 다음 하나는 개방성이다. 많은 아이디어가 대중들과의 호흡 속에서 결정되었다. 돼지 저금통도 7월에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때 노사모끼리 하고 있던 것이 채택된 것이고, 광고 중에 플래시 동영상이라는 것도 홈페이지에서 모금 격려용으로 자원봉사자가 만든 것이고, 박재동 선생이라든지… 그러니까 끊임없이 대중과의 호흡이 이뤄지고 있었다.”
노 당선자는 또 인구에 회자된 ‘눈물 광고’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눈물 광고를 (일반에 공개되기 전에) 나는 보지도 않았다. 누가 만들어 왔는데, 그 사람은 프로이지만, 참여는 자원봉사 형식으로 해서 실비만 가지고 만들어 내고 그랬다.”
실제로 노 캠프와 창 캠프의 선거 운동은 극단적인 대비를 보이는 면이 있었다. 창 캠프의 한 책임자는 “코끼리를 그려서 올려 보내면 생쥐가 되어 돌아왔다”고 했다. 상위 결재 라인이 너무 많아 일을 진행시키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고, 실무선과 결재선 사이에 수정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노 캠프 사람들은 젊고 자유분방하였으며 책임 라인을 최전선에서 수행토록 했다. 노 당선자는 일할 사람을 고르는 데에는 조심하지만 일단 일을 맡긴 뒤에는 전적인 신뢰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것은 실무선 작업자들에게 일할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었다.
또, 두 당 사이 전쟁(?)의 포인트가 대중 마인드를 다르게 짚었다는 것도 당락을 결정짓는 데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한나라당의 ‘반 DJ 정서’를 공격하는 “부패 정권 청산”론은 6.13 지방 자치 단체장 선거와 8.8 보궐 선거로 그 생명성이 소멸되었다. 당 내 ‘노무현 흔들기’로 인해 본의 아니게, 소위 부패 정권과 차별성이 강조되었던 노 당선자를 직접 상대로 하는 슬로건을 찾지 못하고 여전히 반 DJ 정서에 의존했다는 것은 실책이었다. 노-정 단일화 이후 대적 상대가 뚜렷해진 바이면, DJ가 아니라 노를 상대로 하는 슬로건이 나왔어야 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노 캠프가 들고 나온 “낡은 정치 대 새 정치” 슬로건은 여-야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구 정치 환경에 싫증난 젊은 세대의 새 정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노 당선자 자신이 갖고 있는 새 정치인 이미지에 가장 적합한 슬로건이었다.
노 캠프는 노-정 단일화가 이뤄진 뒤에 급속하게 결속력을 보였다. 물론 전방위 부대는 처음부터 노와 함께 있었던 이들이지만 더이상 ‘노무현 흔들기’는 지속되지 않았다.
일하는 동안 호흡이 잘 맞았던 이들은 누구였던가, 하는 본지 질문에 노 당선자는 “선대위가 잘 짜여져 있지 않은가? 개인 개인 약점이 있지만 다들 자기 할 일들을 훌륭하게 해냈다. 누가 한 사람이 종합적으로 통제하지 않았지만 상호 대화를 통해 그런대로 의견 차이를 조절해내고 신속한 의사 결정, 기동성과 유연성에서 한나라당을 완전히 압도했지 않은가?”라고 답했다.
흑색 선전의 퇴조
여론 조사 기관 ‘폴 앤드 폴’의 조용휴 대표는 올해 4월에 “누구라도 네거티브 캠페인을 벌이는 쪽이 질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더 이상 우리나라 사람들이 네거티브 캠페인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6.13 과 8.8 선거에서 양당간 난무했던 네거티브 캠페인을 노 당선자가 잠재운 것도 그의 새 정치 이미지를 굳혀 주는 데에 한몫 한 것으로 보여진다.
돈 없이 선거한다
노무현 당선자의 보물단지는 ‘노사모’였다. 인터넷을 통한 자생적 모임인 노사모는 노 당선자의 흔들리지 않는 열혈 지지 세력이었다.
‘DJ 광신도’라는 말이 갖는 부정적 이미지를 ‘노무현 광신도’는 “그래, 나 자랑스럽게 광신도다” 하는 말로 바꿔 놓았고, 지역적이 아니라 전국적 지지 세력을 가졌다. 그들은 그것을 “유쾌한 반란”이라고 표현했다.
언론, 문화, 정치, 예술 전 분야에서 고루 ‘자원 봉사’를 해 준 것은 돈 없는 선거를 치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노 당선자의 한 참모는 “각계 프로들이 이렇게 열성적으로 자원 봉사하는 것은 처음 본다. 고맙고 미안하다”고 여러 번 말해 왔었다.
‘콩쥐’ 노무현과 국민
한국인들에겐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특별한 정서가 있다. 약자에 대한 감성적 배려가 서구인들보다 훨씬 크다는 점이다. IMF가 터졌을 때 금모으기 운동이 일었던 것이나 수재가 났을 때에 모이는 수재 의연금의 액수를 봐도 그렇고, 노 당선자가 당내에서 ‘내 팽개쳐질 때’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결집력은 훨씬 강했다.
노 당선자는 그의 지지율이 한창 추락하고 있던 때에 가까운 참모들에게 “국민은 내가 땅바닥에 처참하게 떨어졌을 때에 비로소 나를 끌어 올려 줄 것이다”라고 했었다.
노 당선자는 자신의 승리를 전적으로 국민의 승리로 돌린다. 입발린 소리가 아니라, 조직과 돈과 계보가 없는 3무(無) 정치인인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국민의 지지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승리 포인트는 낡은 정치에 염증이 난 국민들이 원하는 새 정치에 대한 강력한 욕구이자, 그에 부합하는 노 당선자의 시대적 감각 덕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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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왜 또다시 패배했나
‘변화 열망’ 끌어안지 못한 ‘낡은 정치’의 귀결

2002-12-20 오전 12:21:26 <프레시안 임경구기자>
1백48석을 거머쥔 원내 제 1당. 그에 따른 막강한 조직력과 자금력. 타 후보와 비교가 안되는 화려한 참모진. 이른바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주류 언론의 전폭적인 지원. 게다가 투표일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상대 진영의 핵분열까지.
선거에서 휘두를 수 있는 무기란 무기는 모두 지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또다시 집권에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한나라당과 이 후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끝내 노무현 후보를 21세기의 첫 지도자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감동의 정치’에 실패
그것은 한마디로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낡은 수법의 정치로 일관해 변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거 막바지까지 이 후보는 ‘법과 원칙’, ‘합리’와 ‘안정’을 내세웠다. 상대방인 노무현 후보의 감정적이고 즉흥적 이미지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이회창만의 캐릭터였다. 10개월동안 펼쳐진 대선 레이스에서도 이 후보에게는 이렇다 할 ‘악재’도 없었고, 그렇다고 특별한 ‘악수’도 두지 않았다. 정치권을 휩쓴 ‘노풍’, ‘정풍’ 앞에서 이 후보 지지율이 꾸준하게 30%대를 유지한 ‘비결’이었다.
그러나 이 후보는 고정표만을 지켰을 뿐, 변화와 개혁을 갈망하는 국민적 기대를 수렴해 내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노무현, 정몽준 후보의 지지율이 최저치로 하락한 1강2중구도 상황에서도 이 후보의 지지율은 ‘마(魔)의 35%’라는 장벽을 뛰어넘기가 힘겨웠다.
가장 큰 이유는 ‘감동의 정치’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일시적 바람이든, 월드컵 성공에 힘입은 허상이든 ‘노풍’, ‘정풍’에는 낡은 정치의 개혁을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심리가 응집돼 있었다. 정작 정치 입문 6년 동안 ‘대세론’이라는 수식어가 떠나지 않았던 이 후보에게서는 한번도 발현되지 않은 현상이었다.
‘안티의 정치’에 기댄 네거티브 선거전
그 사이 이 후보와 한나라당은 도청 문건 폭로, 색깔론 시비, 무차별한 의원 영입 등 낡은 정치의 악습을 되풀이하며 변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에 등을 돌렸다. 특히 이번 대선처럼 세대간 분화가 뚜렷한 구조에서 젊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사로잡는 데 이 후보 진영은 실패했다.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탓이다.
또한 지난 5년간 오로지 ‘반DJ 정서’에 기댄 채 정치적 희망을 제시 못하는 ‘안티의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염증을 이 후보와 한나라당은 눈치 채지 못했다.
대선의 전초전 격인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DJ 때리기’로 톡톡한 재미를 봤다. 그러나 반사이익에 기댄 네거티브 선거전의 효과가 대선까지 이어지리라는 기대는 한나라당의 착각으로 드러났다. 국민들은 이 후보에게 부패정권을 심판할 자격을 결국 부여하지 않은 셈이다.
선거전략 차원의 실패
이 후보는 또 자신에게 덧씌워진 ‘특권층’ 이미지를 끝내 떨쳐버리지 못했다.

30여년간의 법관생활,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쌓아온 ‘대쪽’ 이미지는 ‘병풍’과 ‘빌라 파동’ 등을 겪으며 현 정부의 권력비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실추됐다. 특히 9월까지 이 후보의 발목을 붙들었던 병풍 파동은 사실상 이 후보의 손을 들어준 검찰 조사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저변에 쌓인 의혹까지 털어내지는 못했다.
한편 선거 전략적 차원에서도 보면 자신의 지지세력인 이른바 보수세력을 견인해 내는 데 실패한 점은 이 후보의 결정적 패인으로 꼽힌다.
노-정 단일화 전, 이념과 성향 면에서 이 후보에 가까운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가 “이회창 후보와도 연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표했으나 이 후보와 한나라당은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정몽준 효과’에 상대적으로 둔감했다.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의 갈등도 잇따른 자민련 의원 영입 등으로 선거 막판까지 끝내 풀리지 않았다. 의원 영입은 곧바로 여론의 ‘역풍’으로 귀결됐고 이로 인해 김 총재의 적극적 지원을 끌어내지 못한 점은 접전이 예상되던 충청권에서 패배한 한 요인이 됐다.
또한 인터넷의 영향력 등 변화된 미디어 선거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금력과 조직력에 의존한 선거로 일관했다는 점도 이 부분에 발빠른 대응을 보인 노무현 후보와 대조되는 부분으로 평가된다.
☞프레시안 홈페이지 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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