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뉴스 박원진 기자) = 사립학교를 육성하여 민족정기를 함양하라.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고 잘 교육받은 학생 한 사람이 동양을 진압할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지키되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 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 一人邦定國 一人鎭東洋 克遵此道 勿負吾志 –.
일제(日帝)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던 1939년 6월 16일. 그는 갔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면서 가슴에 담아두었던 교육이념을 유언에 남기고 여사는 갔다. 송설(松雪)학원을 세운 송설당 할머니가 저 세상으로 가면서 그 동안 저축한 동산과 부동산 등 나머지 전재산도 손때 묻은 학교에 다 내놓는다는 유언장도 남겼다.
이렇게 해서 김천중·고등학교 교주 송설당 할머니 생애일대가 이승을 멀리 했지만 그의 교육이념은 날이 갈수록 후학들에 의해 생생하게 그리고 영원히 빛나고 있다.
이제 5만여 송설 동문의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는 기념사업을 계기로 졸업생이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창겸 동문이 추적, 문헌에 고증된 기록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송설당 할머니의 거룩한 생애를 조명한다.
최송설당 할머니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김천시 문당동으로 옛 지명은 김산군 군내면 문산리이다. 1855년 8월29일 아버지 최창환과 어머니 정옥경 사이 무남 3녀 가운데 장녀로 세상을 구경했다. 송설당이 상경하여 누룩곡에 거처하면서 불교에 귀의한 것은 40세이던 1894년, 김천에서 부친을 잃은 후였다. 이후 3년만인 1897년 궁중 엄비(嚴妃)와 가까워져 이은(李垠)황태자가 탄생하자 입궐, 보모가 되어 궁중생활이 시작됐다.
송설당은 처음 당호(堂號)였는데 무교동에 마련했던 저택 이름을 송설당이라 하다가 뒤에 자신의 호로 부르다 이름으로 굳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19년 민족시인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의 자문을 받아 김천에 고부제실(古阜劑室)과 정걸제(貞傑齊)를 지은 것으로 보아 송설당 할머니는 그 때부터 이미 나라 잃은 슬픔으로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던 만해선생과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30년 5월 최송설당 할머니는 드디어 김천고보를 창립키로 결정했으나 일제가 실업계를 강요함에 따라 인문계학교 설립목적의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해 당시 동아·조선·조선중앙 등 신문의 열화같은 성원에 힘입어 마침내 이듬해인 1931년 2월 5일 재단법인 송설당 교육재단을 인가 받았다.
그해 5월9일 초대 안일영 교장이 취임한 가운데 감회어린 첫 수업이 시작됐으며 2대 교장에 취임한 정열모 선생은 한글학자로 재임중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됐고 일제 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교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1932년 6월2일자 당시 발행됐던 동광(東光)에서 춘원 이광수는 ‘옛 조선인의 근본도덕 전체주의와 구실주의 인생관에서 최송설당 등의 사회봉사자들의 갸륵한 행위가 서양식 개인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오 도리어 전설적 조선정신에서 나온 것’이라는 글을 실어 세인들을 기쁘게 했다.
1935년 교정에서 있었던 교주동상 제막식에서 여운형 조선중앙일보 사장은 ‘열차 편에 김천에 들어와서 생명탑이라 할 만한 김천고등보통학교가 뚜렷이 서있음을 보니 오아시스를 만남과 같았다. 사막가운데 이런 오아시스가 일개 부인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것이라고 하니 동서고금 역사에 그 유례가 극히 드문 것’이라고 극찬했다.
또 송진우 동아일보사장은 ‘최송설당의 사업이 굉장한 것은 더 말 할 것이 없다. 우리가 천언만어로 그 공덕을 말하지 않아도 사업 그 자체가 스스로 빛나게 될 것’ 이라고 축사했다.
그리고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 역시 김천고보를 설립한 것은 한마디로 조선 건설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치하하기도 했다. 이밖에 이인·박대륜·김청암스님 등 민족의 등불로 활동하던 언론·법조·불교·교육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동상제막을 축하했다.
이러한 최송설당 할머니가 슬픈 비극을 맞은 일도 있었다. 할머니가 저 세상으로 가신지 6년만인 1945년 6월의 일이다. 그러니까 문명 최초로 인류에게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잔악한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기 두 달 전이다. 각계로부터 축복을 받으며 김천중·고교정에 세워진 최송설당 할머니 동상을 일제가 강제 공출이란 이름으로 철거 해 가지고 간 것이다. 지하에서 할머니가 얼마나 통한의 가슴을 두드렸을까. 이렇게 마지막 발악을 한 일제의 인간적 타락의 실상이 추악한 모습으로 할머니에게 비춰졌으리라.
그러기에 최송설당 할머니의 높은 이상은 사후 반세기가 지난 후학들이 주축이 돼 역사관을 건립키로 하고 활동중에 있다. 이와 함께 송설당 기념사업회 여석기 이사장과 김창겸 실무위원이 보훈처에 송설당 할머니야말로 독립유공자가 돼야 한다는 내용을 들어 지정을 위한 신청을 내는 일도 했다.
기념사업회가 평가한 최송설당 할머니의 자화상은 어떤가. 여걸여장부로서 우리나라 의 위대한 교육공로자이고 독실한 불교신자에 미(美)와 선(善)을 고루 갖춘 할머니다.
그리고 지극한 효심을 가졌으며 김천을 가장 사랑한 분이고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였다. 또한 성실·자립·봉사정신은 송설당의 3대 덕목이다.
기념사업회가 관망한 향후의 상은 어떨까. 묻지 않아도 김천과 송설의 어머니에서 한국인 모두의 어머니로 군림해야 하고 한국 근 현대 선도적인 여성 사회사업가와 교육사업가이시다. 한국 전통 여성문학의 마지막 보루이고 현대문학과의 가교적 역할을 해야 하며 일제하 민족독립운동가들의 후원자이고 사상적 지주 등으로 승격돼야 한다. 동양적 존재에서 세계인류적 존재로 승화됨이 마땅하다는 것이 후학들의 바람이다.
이와 함께 기념사업회가 앞으로 추진할 계획에도 사실적 꿈이 현실로 드러나도록 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학술분야에서 송설당 연구자료를 집대성하고 송설당 유적 발굴·발견·수집·전시에 힘쓴다는 것 등 모두 6개 사업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기념물 분야도 활발할 움직임이다. 송설당 공원을 조성하고 서울무교동 전 송설당 주거지에 대해 송설당로 명명 운동과 어록비 건립 등 7개 부문 사업으로 돼 있다. 문화분야에서는 송설당 애니메이션을 제작, 방영하며 송설당 역사극 드라마 제작 방영 등 7개 분야 사업으로 세분해 추진키로 했다. 교육과 홍보분야에서도 야심 찬 계획이 수립되어 있다.
한국여성사 등 대학생용 교재에 송설당을 수록하는데 힘쓰고 있는 한편 송설당 관련 유적지 답사와 수련회를 지원하고 송설당 상을 제정, 송설당 정신계승여성자원봉사단 조직 등 13개 분야로 되어있다.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오직 교육을 통해 인재를 육성하는데 힘 써 온 최송설당 할머니는 동상제막당시 좌·우 민족의 대 지도자로 사상적 대립관계에 있던 여운형·송진우 선생을 한자리에 참석토록 하는데도 성공했다. 민족의 쌍 거목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함으로써 해방 후 대립으로 치닫던 좌우익 통합에 노력한 흔적도 최근 본보를 통해 사진이 공개됨에 따라 고증됐다.
이로 미루어 최송설당 할머니의 교육이념은 영재육성을 표방한 목표가운데 국가와 민족의 화합정신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 <錫>
『김 창 겸(중37․24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길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