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 부끄럽게도’ 나는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던 2002년 6월의 시청앞 광장을 1987년 6월의 시청앞 광장과 비교하는 것이 몹시 언짢았다. 두 장의 사진을 나란히 실은 대다수 언론의 선정적 발상에 분개하기도 했다. 거기엔 가치는 없고 머릿수만 있었다.
대신 나는 그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국가주의의 망령을 지적하고, 맹목적 열정과 흥분상태를 장삿속에 이용하려는 상업주의의 교활함을 지적하는 목소리에 솔깃했다. 붉은 물결로 뒤덮인 시청앞 광장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 기록사진이나 북한의 군중대회와 판박이로 다가왔다. 거대한 ‘대~한민국’ 함성의 저편에선 ‘위대한 게르만 민족’ ‘덴노 반자이’(천왕 만세) 따위의 소리가 음흉하게 미소짓는 듯했다.
이들이 밤이슬 한낮 뙤약볕 속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온몸으로 응원할 때,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자들은 전세 비행기로 날아다니며 경기장 귀빈석에서 경기장 안팎의 이 충성스런 볼거리를 관람하고 있었다. 노예검투사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로마의 귀족과 다를 게 무언가. 거기엔 ‘국가’를 참칭해 정치권력을 유지확대하고, 인권을 유린했던 자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이런 생각은 엘리트주의 혹은 권위주위는 아닐까 하는 반성이 들기 시작했다. 오로지 내 경험만을 잣대로 삼고 있었다. 달라진 환경과 달라진 감수성 따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또 그들을 맹목적 애국심에 날뛰고, 상업주의에 휘둘리는 뜨내기로 전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에 의해서도 동원되지 않았다. 누구도 동원할 수 있는 무리도 아니었다. 그들은 학예회에 나선 학생처럼 티셔츠나 페인팅, 노래, 몸짓 등을 마련했다. 이것을 입고 들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 아스팔트 위에 대여섯 시간씩이나 앉아 전국 규모의 걸판진 잔치를 벌였다.
이들의 몸짓과 소리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생존권 확보를 위한 노동자들의 싸움은 외면당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을 그들 책임이라 할 수 있을까. 장독에 구더기 끼고, 난전엔 각다귀들이 나대고, 명절 땐 빈집털이가 성업하기 마련이다. 사용자와 공권력이 빈틈을 이용한 것이고, 언론이 이를 방조한 것일 뿐이다.
25일 나는 광화문과 시청앞을 쏘다녔다. 앞으로 세상을 이끌어갈 그들의 감수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과거의 기억 속에 유폐된 변두리 냉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간특하게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함성 속에서 길고긴 한나절을 보낸 뒤에야 나는 알았다. 나의 경험으로 그들의 열정을 이해하려는 것이 뉴턴 물리학으로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다만 그들과 나는 그 순간 ‘크게 하나됨’(大同)을 경험하고 있었다.
곡절 많은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런 크게 하나됨의 기억이 별나게 많았다. 4·19혁명과 6·10항쟁이 그것이다. 4·3, 광주5·18민주화운동도 있었다.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사태때 자발적으로 일어났던 금모으기 운동도 그 연장선 위에 있었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 희망찾기를 위한 몸부림이 빚어낸 것이었다.
2002년 6월의 물결은 더이상 희망찾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앞선 세대를 딛고 더 멀리, 더 높이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앞선 세대와 달리 세상을 받아들이는 감수성과 세계를 새롭게 꾸미는 상상력, 그리고 함께 맺고 푸는 응집력이 있었다. 세계가 지금 ‘대~한민국’을 주목하는 것은 축구 경기력만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이런 열정과 창조적 감수성이다.
그러면 이들의 꿈은 이루어졌는가. 아니다. 그러면 한여름 밤의 잔치로 끝났는가. 아니다. 그들의 꿈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꿈의 날개를 펼치도록 하는 것은 6·10이나 4·19 등 큰 하나됨을 경험한 앞선 세대의 몫이다. 우리는 우선 이들을 6월 세대라 이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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