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천”은 삼산이수의 고장인 김천의 역사이며 김천인의 삶을 면면히 키워왔다. (한길뉴스 박원진 기자) =

모르는 길을 갈 때는 가더라도 발이 먼저 가고 뒤따라 몸이 가고 그 뒤를 머리와 가슴이 가야 한다는 말을 누군가 했었다.
그러나 감천발원제를 한다는 말에 ‘발’보다 마음이 먼저 달려가고 있었다.
시내에서 거창 통로라고 불리는 국도를 약40분가량 숨 가쁘게 달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가을 들녘은 한적하다 못해 고즈넉해 보인다. 가을 날씨답지 않은 추위 때문일까? 발원제를 위해 출발하는 대덕면 직원의 뒤를 따랐다 행여 길을 잃고 헤매게 될까봐? 아는 길도 물어가라 했는데 하물며 모르는 길 임에랴!
산기슭을 돌아들어 굽이굽이 비포장도로를10여분 달렸다. 덜컹거리는 이 길이 경상 남·북도와 전라도를 잇는 길이었다고 해서 감회가 느껴진다. 이 길을 따라가면 전라남도 무주군과 경상남도 거창군이 나오게 된단다.
도로의 끝 거창군과 김천의 경계 지점에 다다랐다. 거창군 쪽 포장도로를 따라가면 차량이 쉽게 진입할 수 있어 편하게 갈수도 있었으나 김천시민의 젖줄인 감천 발원지를 가는데 남의 땅(?)을 지날 수 없다는 생각에 간신히 차 한대만 지나다닐 좁은 길로 들어섰다. 저 멀리 농장 지붕이 보인다.
문영학(84세)옹의 농장이다. 감천 발원지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다. 20여 년 전 이곳으로 들어와 산을 일구고 염소를 키우는 일로 소일거리로 삼고 어린 증손주 둘과 부인, 유통업에 종사하는 손자 내외 이렇게 여섯 식구 4대가 한 지붕 밑에 살고 있다.
자동차 소리에 문을 열고 반가이 맞아주었다. 날씨가 추우니 들어와 차라도 한잔 하고 올라가야 추위에 떨지 않는다며……
문영학옹은 분홍색 한복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로 제지낼 차림을 끝내고 사람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옹은 발견 당시의 발원지 모습을 이렇게 말했다.
염소를 먹이기 위해 나갔다가 물이 솟는 것을 보았다고 “이산이 902m인데 800고지 높이에서 물이 솟는 게 참 신기했었다” “요만한 방구가 마치 여자 하체의 음부를 닮았는데 물이 퐁 퐁 솟아올랐어!” “지금은 공사를 하고 물길을 파내어 그 모습이 없어졌지” “아무리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도 수량이 변함이 없어” “저 물을 1년에 세 번만 마시면 90살은 더 산다고 하더라고” 시간이 다가와 집 뒤쪽 가파른 산길을 걸어 발원지를 향했다.
낙엽과 떨어진 도토리와 몇 개 주워 넣은 밤톨로 산속의 가을을 만끽하다 발 밑 살얼음 부서지는 소리로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음을 보았다.
“다람쥐들 겨우살이 먹인데 사람이 줏어가면 우야노” “안 그래도 꿀밤하고 밤이 해갈이 한다고 올해는 많이 안 달렸어” 그 말에 얼른 주머니의 밤을 꺼내 던졌다. 괜한 욕심에 미안하고 부끄러워졌다.
발원지에 도착하자 문영학옹은 두루마기를 벗어 한쪽에 두고 고무장갑을 끼고 샘 주변 청소를 시작한다. 물길에 떨어진 낙엽들을 걷어내고 샘물을 퍼서 물길을 깨끗이 씻어내는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 가슴이 따듯해 졌다. 시간이 날 때마다 올라와 샘 주변을 청소해왔단다.
김천 문화원 농악대의 지신 밝기를 시작으로 백두대간의 장엄한 기상이 서린 봉화산 감천 발원지에서 시의 만년 대계를 위해 공공기관 유치와 혁신도시건설을 기원하고 시민의 생명수인 감천이 마르거나 넘침이 없도록 감천 발원지 신령의 굽어 살피심을 빌었다.
제를 지내고 모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눌 때 여담으로 “내년엔 봄에 날을 받아야 할 것 같다. 가뭄 안 들고 홍수 안 나게, 농사 잘 되도록, 봄에 비나리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이런 말들이 오갔다.
발원지를 오가는 길이 험해서 자녀 교육을 위해 방문을 원해도 쉽게 오갈 수 없어 시민들의 방문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아울러 가지게 된다.
인류 문명의 발원지를 강이라고 한다면 “감천”은 김천의 역사이고 김천인의 삶이기도 하다.
저 옛날 삼한 시대부터 감문국, 주조마국 어모국이 감천을 근거로 흥망성쇠를 거듭했고 오늘은 15만 김천시민들의 젖줄이 되고 있다.
조선 후기와 근대에 들어서는 부산포구에서 생선과 소금을 실은 배들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김천에 들어올 정도로 풍부한 수량을 감천은 가졌었다.
그것을 발판으로 아랫장터는 전국5대 시장의 하나로 명성을 날렸고 물산을 풍부하게 했었고, 지좌동의 “배다리”라는 동네 지명의 유래가 거기에서 비롯됐다.
봉화산 너드렁 상탕에서 발원한 감천1백7십리 물줄기는 대덕면의 새목골 물과 관기리의 감호천을 모아 흐르다, 지례면에 이르러 구남천·부항천을 합하면서 하폭이 확대되고 구성면에 이르면 무릉천·하원천이 합쳐진다.
조마면에서 강곡천과 대방천을 합해 북쪽으로 흐르다 신음동 솟구미에서 직지천과 합류한 그 물줄기는 다시 북동쪽으로 흘러 농소면의 율곡천, 남면의 송곡천·연봉천, 개령면에서는 아천과 감문천을 모아 다시 외현천을 받아 감문면 배시내(채촌 3리)에서 김천을 벗어나 선산 무을면의 대천을 합해 마침내는 낙동강과 합수해 영남의 풍부한 선비 문화를 일구어냈고 그 문화를 자양분 삼아 도도히 흘러 부산 바다에까지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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