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석) = 태평양 한 복판에서 루사란 이름을 달고 태어난 불청객이 김천을 향해 달려올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다.
어렵사리 세파를 등에 지고 살아가던 김천사람 28명이 여자애인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루사의 희생 제물로 사라졌다. 애도하고 또 애도한다 해도 사랑하는 우리의 식구, 김천가족들의 생전모습은 영영 볼 수 없다.
태풍으로 수마(水魔)가 된 루사가 요동을 치며 이들을 데리고 간 것이다. 그리고 무지한 인간의 잘못도 화를 당한 인재(人災)의 원망을 사고 있다. 그들을 죽음으로 내 몬 우리의 잘못이 큰 비중으로 남아있다는 말이다. 한 하늘 밑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경사 심한 그 곳에 집을 지어 살게 한 잘못이 있다. 그리고 요괴로 돌변한 루사 소식을 듣고도 안전지대로 대피시키지 못한 실수를 범했다.
명백한 김천에 사는 이웃, 우리의 잘못이다. 본란은 비명에 간 그들에게 김천시민과 함께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 지금 김천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세론 첫 대목의 말씀처럼 오직 물로 가득 찬 황량한 들판만 존재하는 느낌이다.
초토화된 수침지역과 형체도 없이 물 속에 사라진 집터만이 말없이 찾아 온 주인을 맞고 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이토록 한밤을 강타한 재난 앞에 무기력 한 인간의 존재이지만 그래도 내일이 있기에 삶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악몽 같았던 간밤의 지루한 난사(亂事)를 잊은 채 가재도구를 꺼내 씻고 말리며 정리하느라 바쁜 손길을 놀리는 황금동 시장골목 형제들 모습에서 반듯한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 비록 사람의 잘못도 있었지만 김천시 수도사업소와 시청직원들이 일요일인데도 하루속히 수돗물을 공급코자 각종 정수장 기기들을 손질하고 밀려들어 폐수가 된 물을 뽑아내느라 움직이는 활동에서 힘이 솟구치기도 했다.
재난 장소·시간 따로 없다
하지만 정수장 바로 옆을 흐르는 감천 제방보완과 힘이 닿는 한 제2 정수장을 안전지대에 건설해 유사시 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운 것은 불행 중 다행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번에 얻은 교훈을 실행에 옮기는 철학을 겸비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김천의 숙제로 남아 있어 개운치 않은 부문이 있다.
또 하나 태풍 루사가 남긴 교훈에서 정확한 공법을 계산하라는 엄중한 요구가 인간에게 내려졌다. 이른바 땅을 얻는데 목적을 둔 김천시구성면의 감천직강 공사장이다. 땅을 얻는데만 급급했지 수량을 계산하지 않았다. 그래서 낙차공 전방 200m지점에 있는 인공제방이 엄청난 수량을 감당치 못한 채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얄팍한 사람의 상혼이 위험한 계산을 하고 만 것이다.
이 기회를 빌어 부디 두 번 다시 이러한 주먹구구식 공사는 이제 우리주변에서 사라질 때가 됐지 않았나 싶어 제언하는 것이다. 한가지 더 김천사람들이 생각할 문제가 있다. 초속30m를 동반한 이번 루사 태풍으로 가장 큰 피해를 가져 온 곳이 김천이라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이 기간 중 가장 큰 물난리를 겪은 곳은 강원도 강릉이다. 그러나 강릉의 경우는 루사가 한반도 여수지방에 상륙할 때 이미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기상청 예보로는 강릉 앞 바다 동해에서 발달한 저기압이 서북지방에서 내려온 고기압과 대관령이라는 고지대에서 만나 이 준령에 부딪쳐 가공할 비를 쏟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직접적인 루사 피해에 관한 한 가장 심했던 곳이 바로 김천이라는 점에서 재난은 장소와 시간을 구분하지 않고 지구촌 어느 곳이건 불시에 찾아온다는 사실을 익혔다. 59년 전국을 휩쓴 사라호 태풍이나 36년 지도가 바뀔 정도로 한반도를 개벽 시켰던 병자년 수해 때도 김천이 피해 상위에 기록될 만큼 심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루사는 한반도를 지나면서 오른쪽 방향에 있던 내륙 김천시가지를 갈기갈기 찢고 핥는 요술을 부렸다. 아름다운 산과 물 맑은 고장이라 이름난 김천이 새 천년 벽두부터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억울한 시련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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