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 빨치산 남부군 ‘불꽃사단’ 부항지서 습격
70명 대 1천명 한국전쟁사 최고의 승리
(한길뉴스 박원진 기자) = 한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의 전쟁이 발발한지 54년, 휴전으로 남북이 분단된지 51년 반세기란 긴 시간이 흐른 현재까지도 남과 북은 갈라져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슬픈 현실이다.
몇 일 후면 한국전쟁기념일이 다가온다.
국가적으로 남북화해 무드가 무르익고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하며 금강산 육로 여행길도 열려있어 머잖아 통일이 될 것이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한국전쟁은 남과 북의 산업시설과 도로망을 초토화 시켰고 수만은 인명이 살상되고 전쟁포로를 양산했으며, 현재까지도 북쪽 어딘가에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동안의 젊은 청년들이 초로의 늙은이가 되어 조국으로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전쟁 발발 54주년을 맞아 한국전쟁 당시 우리지역의 피해상황과 지역최대 전투비사로 전해오는 빨치산 이현상부대 남부군의 부항지서 습격사건을 전투현장에 있었던 장용문(74세)옹의 생생한 육성 증언을 바탕으로 재 조명하고자 한다.
1950년 7월 남으로 철수하던 각 도의 경찰군 가운데 부항면 월곡리에 있는 부항초등학교에 경기도 가평경찰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면서 북괴군의 남침에 대비하다가 철수하고, 8월초 북괴군이 지례면에 주둔, 수시로 부항면에 드나들며 지방의 좌익분자들을 앞세워 부락주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노력 동원에 광분했었다.
1950년 9월 25일 낙동강 전선에서 패주하던 북괴군은 무주, 영동 상촌 등지로 후퇴하고 잔여병력은 삼도봉에 은거하며 수시로 부항지서를 습격 해왔다.
그 해 10월 지서가 있는 유촌리를 수 차례 공비들이 습격 가축•식량•의류 등을 탈취해 가며 민가에 불을 질렀다. 같은 때 북괴군 1개 중대가 아군복장으로 해인3리에 침입 소를 요구 이를 거절하자 4일 후 다시 찾아와 문종배씨의 부친 문필곤씨와 숙모 이씨를 방안에 묶어 감금하고 불을 질러 살해한 다음 마을의 가축과 식량을 약탈해가는 등 북괴군 패잔병들의 패해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했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장용문(74세)옹과는 황금동의 양금폭포앞에서 만났다.
전투현장이 있는 부항면 사등리 66번지 현 김천경찰서 남부지구대 부항치안센터까지는 짚차로 이동하며 차 안에서 많은 비사들을 낮으막하게 전투에서 전사한 전우를 생각할때는 울음썩인 목소리로 증언해주었다.
“나는 그때 군에서 1년간 복무하고 몸이 안 좋아 의가 제대한 상태였었지” “그런데 전쟁이 터진거야” “의용경찰이 부항지서에 나말고 20명, 한청소속 청년 30명 기타 방위군 포함 70명정도 밖에 안됐어” “ 상황이 긴박해 급조된 조직이라 변변한 무기도 없었고 무기도 인민군에게 빼앗은 것과 딱총 등이 뒤석여 있었어”

“금굴에 공비가 숨어있다는 말에 불을 질러 너구리 잡듯이 잡아냈지” “13명이 잡혔는데 그 중 2명은 여자였어” “그 중 한 여자는 정말 이뿌더라고 호리호리하니” 산길을 내려오다 그 여자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흘려서 동료가 주웠지 이게 뭐냐고 큰소리로 말하며 열어보니 금덩어리 였어” “나중에 물어보니 고향이 서울이고 부자집 외동딸인데 인텔리로 좌경사상에 물이 들어 집을 나올 때 어머니가 요긴하게 쓰라고 주머니에 넣어준 것이라더군”
“얼마나 만졌는지 주머니가 반질반질해 저 엄마 생각날 때마다 꺼내 봤겠지” “그 금덩이는 높은 사람이 가져갔어” “ 산은 정말 잘타데 나도 젊을때는 힘 좋았는데 그 여자 손을 묶고 앞세워도 못 따라가겠어” “저들끼리 비표가 있더라니까 한 네 군데 찾아냈었지, 바위밑에 교묘하게 숨겨놓고 또 나무껍질을 칼로 도려내기도 하고 희안하더라구 그래서 적부대의 이동경로를 알 수 있었어” 이렇게 말을 듣는 사이 부항지서로 접어들었다.
부항치안센터에서 오른쪽 비스듬한 구릉진 한 켠에 망루 형태의 이상한 구조물이 서있다.
군데 군데 총탄자국도 눈에 뜨이고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보기 힘들지만 안에서는 밖을 관찰하기 쉽게 된 구조물이다.
장옹은 지금은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가 파묻혀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됐다고 전투 당시는 지휘본부로 쓰였다고 증언했다.
잠시 만감이 교차하는지 장옹은 숨을 가다듬으며 희미한 기억을 되살렸다. “그때가 50년돈지 51일년돈지 잘 모르겠어” “가을걷이 할 때니까 10월달쯤 일거야” 돌아와 시사를 확인하니 1951년10월20일로 기록되어있다.
부항지서를 습격한 패잔병들은 이현상이 이끄는 빨치산 남부군 예하 ‘불꽃사단’이었고 병력은 1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월곡리를 점령하고 문재용씨 모친편으로 편지를 지서주임 앞으로 보내왔어” “항복하지않으면 1시간이내로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문필봉하고 활인산 등 사방의 산들은 온통 붉은 깃발로 뺑 둘러 쌓여있고 누런 옷을 입은 빨치산들이 삼중 사중으로 포위하고 있었어” “개미 장가듯이 죽 늘어서 있는데 오금이 저리더라고” “한군데만 백기가 꽂혀있었어 그리로 항복해 오라고” 그 때 부항지서의 병력은 박동환, 임춘식, 민영기, 송재환주임과 이원영, 이천만(당시전투에서 전사), 이상기, 장용문, 배창원, 전현배, 백봉록. 박곤 등 의용경찰 민청소속대원등 70명이 전부였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으니 항복은 안돼요” 결론은 이렇게 났다.
항복하지않겠다는 답신을 띄우고 마을 주민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후 마을도가(양조장)에서 술과 돼지고기를 내왔다.
싸 울려면 든든히 먹어둬야 하겠지만 죽음을 코앞에 두고 술의 힘을 빌려서 용기를 얻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정신 없이 싸웠지 콩 뽁듯이 총알은 날아오고 수류탄이 망루에 못 들어 오게 옷으로 입구를 막기도 했어 1시쯤에 김영수(당시 27세추정)순경이 죽었지, 돌아볼 겨를도 없었어” 희부옇게 날이 밝아오자 적들이 후퇴를 했다.
사흘 후 또다시 습격이 시작됐다. 외부지원을 차단하기위해 전신주를 모두 톱으로 자르고
인근 무풍지서 파견대를 습격 60m 로켓포까지 탈취해서 화력을 보강해 왔다.
박동환지서 주임은 “이제 모두 죽었다 가슴을 치며 울었다”고 장옹은 회상했다.

당시 부항지서는 사방으로 2m50cm 가량의 외벽을 이중으로 쌓아올린 뒤에 그 위에 나무를 얹고 흙을 덮어 띠(잔디)를 덧 씌워 지하로 망루와 연결 외부는 살피기 쉬웠으나 외부에서 내부로 침입하기 어려운 구조였고 바리케이트도 쳐두어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고 했다.
2차 전투도 미리 구축해둔 지형지물과 대원들간 격려와 불굴의 의지로 험난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냈다. 2차 전투에서 이천만(당시 23세 해인동거주)대원이 전사했다.
두 차례의 전투에 모두 참여한 장용문 옹은 “당시 말만들어도 산천이 떨었던 1천명 규모의 대 게릴라부대를 이겨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며 “먼저 보낸 동료들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시는 이땅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될 것”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70명대 1천명의 한국전쟁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승리를 거둔 전투를 김천시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51년10월20일 밤 9시 덕유산에 은거하던 북괴패잔병이 부항지서를 다음날 아침까지 공격하다 물러갔다. 당시 적의병력은 1천명이나 되었다. 전투결과 경찰관1명과 청년단원4명이 전사하고 의경1명이 실명하는 중상을 입었다.


<취재후기>
역사현장 보존대책 마련 아쉬워
부항지서 전투비사를 장용문옹의 부형되는 장학문옹이 자서전형식으로 발간한 “노을과 그림자”라는 책에 동생이 참전한 부항지서 전투를 언급한 것을 바탕으로 장용문옹께 취재 동행을 부탁 드렸다.
취재에는 기자(박원진)와 경북내일신문 신용성기자, 장명길(장용문옹의 조카) 발행인과 장옹의 친구분등 네 명이 역사의 현장을 동행했었다.
짧은 일정으로 인해 보다 상세한 자료들과 현장을 스케치 할 수는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참 보람된 취재였음을 밝혀둔다.
역사란 기록되어진 것 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다부동 전투는 국가의 사활이 걸린 전투이었으니 만큼 전적비와 기념관이 있다.
이름 모를 곳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을 초개 같이 던진 수 많은 무명용사들의 희생을 우리 후인들은 진정 기억해야 할 것이다.
취재 도중 느낀 아쉬움은 이 같은 역사적 현장에 왜 아무런 이정표하나 마련돼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지역의 후세들을 위해 자랑스런 선조들의 전투사를 기념하는 전승비 정도는 세우는 것도 희생하신 님들의 뜻을 기리는 방법은 아닐지……..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단편적이지만 호국의 기운이 서린 역사의 현장을 잘 보존, 어린 세대들을 위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지혜야말로, 더욱 값진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끝으로 짧은 일정이었지만, 취재에 응해주신 장용문옹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글을 고(故) 이천만, 김영수 두 대원께 바친다.


아래 자료는 김천시 승격50주년 기념발간한 김천시사(史) 자료를 발췌한 것이다.
당시 김천 시민들도 서울지방 주민과 마찬가지로 공산군이 38선에서 일제히 침공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한낱 국부적인 충돌사건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전세는 가열되고 정부가 대전으로 천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짐과 동시 남쪽으로 줄을 잇는 피란 대열을 보고서야 급박한 상황이 닥쳤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정부가 다시 대구로 이동했다는 소식에 접했을 때는 한층 긴박감에 휩싸였었다.
각급 학교는 7월 초순에서 중순까지 일제히 휴학했고 각종 전투요원들은 반격에 참여할 태세 준비에 바빴었다. 용감한 청년들이 시민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자원입대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으며, 애국청년단체에서는 국군 모병 임무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김천에 소개령이 내려진 것은 7월 31일 오후였다. 각 기관 단체들이 주민들에게 골고루 후퇴령을 알릴 겨를도 없이 먼저 후퇴했고 그날밤 11시 김천역에서 최종 열차가 황급히 떠나갔다.
8월 3일 적군 점령하에 든 김천 시가지 일대가 유엔군의 폭격으로 일시에 불바다가 됐으며, 길거리는 폭격으로 넘어진 전주와 전선이 엉켜 길을 막아버린 처참한 생지옥이었다.
길거리는 폭격으로 넘어진 전주와 전선이 엉켜 길을 막아버린 처참한 생지옥이었다. 공산군 수중에 들어간 김천은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을 단숨에 건너려는 적군의 중요 전진기지가 됐었다.
공산군 정치 공작대가 이 지방을 설치며 다녔고, 그들에게 동조하는 좌경분자와 부화뇌동하는 무리들이 세상 만났다는 듯이 날뛰었다. 미리 조직되어 내려온 인민위원회, 치안대, 농민동맹, 여성동맹 등이 피란 못간 양민들을 못 살게 했다.
공산군은 유엔군의 폭격이 뜸한 야간을 이용해 양민을 그들 조직체에 얽어매고 강제 동원, 도로와 교량 등을 복구하는데 사역시켰으며, 심지어는 수십리 수백리 떨어진 지점까지 군량과 탄약 운반등에도 동원 하였다.
피란 못 간 사람들은 적군 치하 50일을 생지옥과 다름없는 가운데 갖은 곤혹을 겪어야만 했다. 피란간 사람들은 그런대로 공산군으로 부터 직접 시달림은 받지 않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가를 역력히 알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피부로 느끼고 몸으로 체험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수복후 제2국민이니 하여 천대를 받았다.
김천은 피해 정도에 있어 전국에서도 가장 격심했던 도시라 하겠다. 교통의 요충지인 김천을 함락시키고 단숨에 대구, 부산을 공략할 계획으로 김천에 전진기지를 두어 그들의 작전상 중요한 거점으로 정하였다.
결국은 이것이 미 극동CIS와 유엔군 정보기관에 탐지되어 집중 포격을 수없이 단행케 했던 것이다. 평화, 남산, 성내, 용암, 황금동이 주요 폭격 지역이었는데 인구가 밀집했던 지역이고, 기관 단체 학교와 주택이 가장 많아 그 피해는 막심할 수밖에 없었다.
시가지는 거의 소실되어 그 비율은 80%가 훨씬 넘는 것이다. 1952년 8월 현재의 경상북도의 전재 피해 상황 조서에 의하면 경북도내 피난민과 이재민을 합한 전재민의 수가 73만명이 넘고, 인명 피해는 전사자 2만5천8백여명, 부상자 1만1천7백여명, 피살자1천5백명인데 이 중에서 김천이 차지하는 수치가 클 것은 말할 나위 없지만 정확한 자료가 없다.
주택 피해상황 조서에서 전소 및 완전 파괴 6만6백여개소 및 일부 파괴 9천6백으로 여기서도 김천이 입은 피해의 몫은 클 것이다.
다만 1958년에 발간된 <<경북대관>>에 의하면 김천시의 경우는 3,739동의 건물(82767평)이 피해를 입었고, 교량 3개소, 도로 파손 12개소, 가축은 전멸에 가까운 정도였는데, 피해액은 2억7823만2천환으로 집계되었으며, 인명 피해는 그 숫자마저 추산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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