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계획 배경-전모(프레시안 강양구) = 2000년 우라늄 농축 실험이 국제 사회에서 큰 파장을 낳고 있는 가운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년대 추진했던 핵무기 개발 계획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구상돼 1979년 10ㆍ26으로 무산된 박 전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계획은 최근 미국 비밀 외교 문서가 공개되고,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이 확보되면서 그 실체를 드러냈다.
박 전대통령, “미사일과 원자탄 보유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암호명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명명된 핵무기 개발 비밀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은 1969년 7월 닉슨의 ‘괌 독트린’ 이후로 알려졌다. 당시 박 대통령은 미국의 한반도 방어구상이 철회되고, 1971년 주한미군 7사단의 철군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안보와 정권 유지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적극적으로 핵무기 개발 계획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미국 하원의 <프레이저 보고서>에 따르면, “닉슨 독트린 이후 한국은 1970년말 국방과학연구소와 함께 비밀리에 무기개발위원회를 만들었고, 무기개발위원회에서 핵무기 개발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는 증언이 나와 있다.
유재흥 전 국장장관은 1999년 11월7일 방송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박 대통령은 두 가지를 강조했다”며 “하나는 압록강까지 갈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자탄을 보유하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월간조선> 2003년 8월호는 오원철 당시 청와대 제2경제수석(중화학 공업 및 방위산업 담당)이 박 前대통령에게 보고한 A4용지 9장 분량의 <원자 핵연료 개발 계획>이라는 비밀 계획서를 공개한 바 있다.
이 계획서는 핵무기의 종류 및 우리의 개발 방향, 핵무기의 비교, 플루토늄 생산 과정, 우리나라의 핵물질 보유를 위한 개발 방향 등의 목차로 구성됐으며, 결론적으로 “과대한 투자를 요하지 않고 약간의 기술도입과 국내 기술개발로 생산이 가능한 플루토늄탄을 택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1980년대초 고순도 플루토늄탄을 완성할 것”을 담고 있다.
10년 내내 계속된 미국과 한국의 숨바꼭질
이렇게 본격적인 계획이 마련된 후, 1970년대 중반부터 핵무기 개발을 위한 핵심기술 도입을 둘러싸고 미국과 한국의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당시 우리 정부는 해외에서 활약중이던 관련 과학자들을 유치하고, 연구용 원자로는 캐나다에, 핵연료 재처리 시설은 프랑스 상고방사에 의뢰했다. 특히 1973년 9월 정부 고위관계자가 상고방사를 방문해 공장건설 계약을 합의하고, 1975년 4월 재처리 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이 체결됐다.
지난 8월2일 <세계일보>에 당시 핵무기 개발 계획의 핵심인 ‘핵연료 재처리 시설 설계서’와 설계도면을 공개한 당시 원자력연구소 핵연료 재처리사업 담당 실무책임자(공정개발실장)였던 김철 아주대 명예교수는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핵무기를 위한) 순도 높은 플루토늄을 만들기 위한 계획이었다”며 “미국의 의심을 살까봐 경수로와 중수로 재처리 시설까지 포함시켰다”고 증언했다.
한편 미국의 방해도 노골화됐다. 박정희 前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최초로 언급한 1998년 비밀 해제된 1970년대 미국 대사관과 본국 사이에 오간 기밀 전문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경 한국 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며, 미국이 동북아 정세를 고려해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미국 정부는 박 정권에게 1975년 ‘핵확산 금지 조약(NPT)’을 비준하도록 하고, 프랑스에는 재처리 시설을 판매하지 말라는 압력을 가했다. 박 前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설득과 협박도 계속됐다.
1976년 1월에는 미국 국무부 관리들이 한국을 방문해 1976년 1월22~23일 주한 미대사관에서 최형섭 과학기술처장관을 대표로 한 우리측 관계자들과 협상을 벌였다. 이 회의를 계기로 한국은 프랑스로부터 재처리시설 도입을 포기하겠다고 밝힌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김철 교수는 “최형섭 과기처 장관과 주재양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과기처 회의에서 미국 국무성 차관보가 재처리의 ‘재’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며 “말을 안 들으면 고리 원자력 발전소 핵연료 공급을 중단하고 심지어 주한미군이 보유한 핵우산을 철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박 대통령 살아 있었다면 85년께 핵폭탄 보유”
하지만 박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의 눈을 피해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확보하는 사업은 1976년 1월말 ‘화학처리 대체사업’으로 바뀌었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대덕에 개발을 위한 별도의 공단을 1976년 12월 만들었다.
미국의 감시는 계속됐다. 미국 관리들은 당시에도 수시로 공단을 방문해 개발 현황을 지속적으로 감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77년에 들어선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수출입은행에 대한 고리 2호기 건설에 대한 금융지원 보류를 결의하는 등 박 정권에 대한 압박을 계속 높여갔다.
이 기간에 한국은 그 동안 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으로부터 획득한 핵 관련 시설들을 짜깁기해 국산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대덕 공단에서는 원자로 설계 기술, 핵연료 설계 및 제작 기술, 농축ㆍ재처리 등 민감 기술 확보 등이 연구됐고, 1970년대 말에는 ‘농축ㆍ재처리’ 기술을 제외하고는 완전한 기술자립을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사업은 1981년까지 완료할 예정이었으나, 미국의 방해로 프랑스로부터 시설 도입이 늦어지면서 1983년으로 목표가 수정됐다. 당시 연구에 참여했던 김동훈 박사(전 다목적연구로사업단장)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의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이 사망한 1979년 10월에는 설계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며 “박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1985년께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런 핵무기 개발 계획은 10월 박 前대통령이 측근 김재규(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당하면서 없었던 일이 됐다. 12ㆍ12 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핵개발을 초기하고 1981년 1월 대덕의 공단을 원자력연구소와 통합 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핵개발에 관한 연구는 물론 원자력이란 용어도 사용치 못하게 했다.
김철 교수는 “1970년대말 중단됐던 핵개발 관련 자료들을 모아 2~3년 정도 연구하면 우리도 핵 재처리 기술을 보유할 수 있을 것”이라며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뒤 미국 압력으로 핵개발이 무산되자 핵개발에 참여했던 연구진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관련 자료들도 대부분 폐기됐거나 사라졌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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