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김천(장재균) = 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유인가.
꿈을 엮어서 그릴 수 있는 이곳! 바로 고향이 아닐까.
어딘가 멀리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김천 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하면 이내 마음이 편안해지며 집에 다 온 느낌이 든다.
가끔. 홀가분한 기분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곤 하는데 여행길에서 들꽃 한포기 나무 한그루 가슴에 담아 오곤 한다.
집에 돌아와 상상만 하여도 행복해지고 심지어 설레어 지기도 한다. 무슨 주책인가 싶은 나이지만 속마음은 마냥 부푼다. 아마도 어릴 적 내 살던 남산골 야산에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었던 붉은 복사꽃이 주범일 테고, 우리 집 정원에 계절을 수놓았던 꽃과 나무들이 공범이 아닐까 한다.
사실 이 설레임도 불과 몇 해 전에 만 하더라도 품을 수 없는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봄 날 우연히 친구 집 정원에 함초롭게 핀 할미꽃을 만났다. 뒷산 양지바른 무덤가에 흔하디흔하던 그 꽃이 이제사 이렇게 가슴이 저미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의식 속에 감감하도록 사라져 버린 작은 것들에 대한 소중함이 내 마디마디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말없이 전율하였었다. 그 후부터 작고 앙징스런 꽃들에게 고개를 숙인 채 인사를 나눌 수 있었고 시선도 그들과 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밋밋하기만 하였던 내 고향 산과 들이 한없이 친근해지며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가을, 야생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지인 몇몇과 백두대간이 지나는 바람재에 올랐을 때, 산 구릉에 백옥 같은 한들거림으로 눈길을 끌었던 구절초, 곧은 기상으로 자줏빛 꽃봉오리를 뽐냈던 칼잎용담, 작은 도라지꽃처럼 얼굴을 내밀고 있는 자주쓴풀, 수많은 억새들을 보고 있노라니, 가르쳐 주는 다른 들꽃들의 이름은, 다 외울 수가 없었다.
그 이듬해 봄부터 혼자이면 혼자, 동행이 있으면 누구라도 관계없이, 우리 고향, 주변 산과 들을 헤매고 다녔다. 소나무, 자작, 은사시, 참나무, 돌장승, 석탑, 석불 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정자나 문화재 같은 것들이 관심 안으로 들어왔고, 찬바람 속에서 제살, 제 빛의 무게로 빛나는 겨울나무처럼, 역사도 아름답게 빛이 났다.
지난해 유월, 마지막 봄볕으로 따갑던 어느 날, 서울에서 반가운 손님이 왔다.
김천을 오고파 했던, 그림 그리는 작가 한분이 조각을 하는 분과 같이 나를 찾아 왔다. 마중을 하여, 내 차에 동승하곤, 우선 직지사로 향하였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직지사로 가는 길이 바뀌었다. 맨 먼저 강변공원으로 가서 나무 그늘 사이를 오가며, 이것저것 들꽃을 살피다가, 종합운동장 쪽으로 간다.
김천대학을 지나 봉산면에 이르면 매계 조위 선생의 생가 터인 율수제가 나온다. 매계 선생은 두보의 시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두시언해라는 책을 지으셨고, 김종직과 함께 신진 사류의 기수로, 당대 문장가로 이름을 드높이신 분이다.
매년 10월경에 열리는 매계 백일장은, 이 선생의 호를 따 30여년을 이어온 우리 고장 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다.
두 분께서는 김천에 이런 훌륭한 조상이 있었냐며 김천이 다시 보인다 하셨다. 잠시 묵상을 하고 난 뒤 뒤편 솔숲으로 향하였다. 도심에 있다 오신 분들이라 그런지, 그윽한 솔 향에 피곤함이 싹 가신다며 좋아하신다.
솔숲을 나와서, 태화리쪽으로 경부 고속도로와 병행하여 한참을 가면, 길가에 용화사가 보이는데, 돌로 빚은 관음보살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 퍽이나 자연스럽다.
몇 해 전 화순 벽나리 민불을 만나고 왔을 때 그 느낌까지는 들진 않지만 그래도 포근하다. 화순의 벽나리 민불은 논 가장자리에 둘러 친 철책도 없이, 안내판 하나가 유일한데 들일하다 잠시 쉬는 농부 같은, 말 그대로 민불이다.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아, 그저 등 토닥이며 안아주고 싶은 그런 이웃 같은 인상을 주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아련한 기억을 뒤로 하며 태화리에서 직지사 방향으로 접어들면, 철길 앞에 커다란 굴이 보이는데, 그 앞 묵집에 들러 채로 썬 묵 한 사발을 먹어 봐야 한다.
막걸리를 한 사발 곁들이면 금상첨화이다. 살짝 시장기를 채우고 직지상가를 지나면 직지문화공원이 나오는데 도포 없는 갓머리 화장실에 들러 시원스레 볼일을 본다.
우리 김천을 정말 자랑할 것 중, 깨끗하고 아름다운 화장실을 꼽을 수 있는데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거야 말로, 누구라도 부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아 그 이름 해우소여 !
나의 너스레에 두 분은 웃음 지으며 잔디밭 시비(詩碑)쪽으로 발걸음을 잡는다. 이곳은 우리나라 명사들의 시는 물론, 백수 정완영 선생의 시비가 있어 더욱 정감이 간다. 두 분은 백수 선생의 고명은 익히 아는 것 같았다.

쓰르라미 매운 울음이 다 흘러간 극락산 위
내 고향 하늘빛은 열무김치 서러운 맛
지금도 등 뒤에 걸려 사윌 줄을 모르네

동구 밖 키 큰 장승 십리벌을 다스리고
푸수풀 깊은 골에 시절 잊은 물레방아
추풍령 드리운 낙조에 한 폭 그림이던 곳

소년은 풀빛을 끌고 세월 속을 갔건 만은
버들피리 언덕 위에 두고 온 마음 하나
올해도 차마 못 잊어 봄을 울고 갔더란다.

선생의 고향생각이 절절하다

경내로 발길을 옮겼다. 대웅전 앞에서 삼층석탑을 둘러보며 갈항사 삼층석탑에 대해 얘기 해 주었다.
단아 하면서도 세련된 신라시대 석탑인 두 탑은, 경주 감은사지 석탑보다 못 할리 없는 국보급 유물인데, 아쉽게도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서울 경복궁 한쪽 귀퉁이에 옮겨져 있다고 한탄을 하였더니, 같이 흥분해 주어 고맙기 까지 하였다.
내친 김에 내가 잘 아는 우리 고향 시인의 갈항리 시 한편을 들려주며, 하루 빨리 우리 김천으로 돌아오길 기원 하였다.

능선쪽으로 오를수록 비탈 바람에 흔들리는 것인지
산길은 휘청거리며 낯설게 엎드린다.
– 중략 –
넋두리 같은 해탈의 흔적과
끈질긴 우울을 안고 견뎌오는 동안
허전한 풍문만 들끓고 지나갔을지 모른다
불타버린 성전 바깥으로 튕겨나간 돌맹이처럼
– 하략 –

성보 박물관 앞에는 수려한 자태의 반송이 우리를 반긴다. 참 곱게도 자랐다. 보면 볼수록 자태가 일품이다.
천년의 무게 앞에서도 청단풍은 허허로이 가지를 뻗었다.
향적암 지붕위 와송은 인고의 세월을 품는 듯 움직일 줄 모르고, 관음전 뜰 앞 배롱나무는 한낮 더위에 졸고 있다.
두 분 손님은 어느새 비로전 내 천불상 앞으로 갔나보다.
주련에 적힌 게송이 계곡 물소리에 젖는듯하다.

약인욕요지(若人慾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維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니 마음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렸다.

직지사를 내려와서 공자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손님 두 분에게 이 길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드라이브 코스인데 이렇게 특별한 분들만 모신다고 하였더니,
“아이구, 이런 송구할데가 있습니까?” 정색으로 미안해한다.
“아니 미안해하실 것 까지 없구요. 단지, 잊지 말고 오래 기억이라도 해 주 세요.” 웃는 얼굴로 말을 하며 구불구불 산길을 올랐다.
바람재 입구인 고갯마루에 잠시 차를 세웠다. 손님의 형색으로는 도저히 바람재를 올라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 잠시 쉬면서, 지난번의 추억을 더듬으며 얘기 해 주었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두 분의 표정에서 우정심을 느꼈다. 저 아래를 가리키며
“빼 놓을수 없는 계곡이 하나 여기에 있는데 가 볼까요?” 하니 아주 좋아하신다. 날씨도 덥고 하니, 내심 발 담굴 데라도 하나 나타나길 기대했나 보았다.
삼성암이라는 팻말이 가리키는 쪽으로 좁은 밭길을 2Km쯤 가보면 아주 조용하고 물 맑은 계곡이 보인다. 바로 길옆이지만, 절을 오가는 신도외엔 이 길을 이용하지 않아서 인지, 올 때마다 별반 사람 구경을 못했다.
발을 담그면 금방 시릴 정도로 물은 차고 맑다. 계곡을 보더니, 이 두 도시인이 환장을 한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바지를 둥둥 걷고 바위에 걸터 앉아 물장구를 쳐대었다.
한참을 그리고 나니 슬슬 시장기가 도는 것 같았다.
“아이구 이제 갑시다. 배 안고파요? 좋은데 안내할테니 식사나 합시다.” 하면서 자리를 털고 있어났다.
잘 포장된 아스팔트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니 찻집이 보인다. 이곳은 연인끼리 차 한잔 하고 가면 안성맞춤인 곳인데 그냥 지나치기로 하였다. 길옆 아슬아슬하게 지어 놓은 정자 하나가 보이면 곧 구성면 소재지인데 3번 국도와 만나게 된다. 왼쪽이 김천방향이니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방초정으로 차를 몰았다.
이 정자는 아주 특이한 것이 있는데, 겨울에도 사용 할 수 있도록, 온돌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오르면, 사각형 모양의 온돌 주위는 마루처럼 나무로 빙 둘러져 있고, 사면의 문은 고리를 만들어, 천정에 높게 매달아, 여름에도 온돌방과 마루를 합쳐, 시원하게 사용 하게끔 되어있는데, 선비들의 풍류가 놀라웠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정자 앞 연못인데, 오래 됨직한 왕버들나무가 못가를 줄지어 섰고, 한가운데 배롱나무의 드리워진 가지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가히 일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지금은 꽃이 필 시기가 아니라, 좀 아쉽지만, 개구리밥이 못 전체를 연둣빛으로 물들이고 있을 때, 붉은 꽃잎이 날개를 접고 앉으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특히 내 얘기를 듣고 있던 화가는 못내 아쉬워했다. 8월이 되어야 배롱나무 꽃이 한창일테니 나도 그때 다시 와보리라.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지례로 향하였다.
지례 흑돼지를 맛보지 않고 어찌 김천을 다녀갔다 할 수 있으랴 !
이리 저리 식당을 찾다가, 석쇠에 지글지글 타는, 고기 굽는 냄새에 끌려 그곳으로 들어갔다. 상추와 깻잎, 풋고추 들을 푸짐하게 담아서 한상 가득히 차려 준다. 인심 좋은 주인아주머니 덕에 배를 든든히 채우고 식당을 나섰다.
이제 어디로 갈까, 쭉 가면 대덕이요, 오른쪽으로 가면 부항인데, 부항쪽은 지례로 들어오기 전, 임천리에서 마산리로 하여, 부항 대야리로 빠지는 길이, 훨씬 운치가 있을 터인데, 그곳으로 가면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기도 하고, 두 분 손님에게, 한꺼번에 많은 것을 다 보여주는 것도, 무리 일 것 같아, 부항길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그러면, 증산으로 가서 청암사와 수도계곡을 보여줄까, 아니면, 우두령 옛길과 감천 발원지를 보여줄까, 망설이다가, 감천 발원지를 가보기로 하였다.
시원스레 뚫린 포장길을 창문을 열고 달리니 바람이 상쾌하였다.
너른 폭으로 유유히 흐르는 감천을 따라, 양옆에는 초록 무성한 산들이 겹겹이 뻗어 나간다. 대덕면 소재지를 지나, 한참을 가면, 좌측에 우두령 팻말이 보인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마을까지 이르면, 그 다음부터는 비포장길이다.
옛길에 이르니 감회가 색다르다.
이 길을 따라, 거창에서 진주까지, 더 멀리까지, 소달구지를 끌고 가기도 하고, 걷고 걸어서 이 길을 넘었으리라.
나의 두 손님은 아직 이런 길이 남아 있냐며, 신기해 마지않았다.
우두령 고개에 다다르니, 거창 쪽이 훤히 보인다. 차에서 내리니, 다람쥐가 놀라 쪼르르 달아난다. 사람이 별반 두렵지 않은 듯, 다시 멈추어 우리를 보고 쫑긋 선다. 우리 일행은 다람쥐가 놀라지 않도록 가만히 서 있어 주었다.
두 분 작가와 다람쥐를 위해 쑥부쟁이 시 한수를 읊어 보았다.

쑥부쟁이끛을 보러
나가는 일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아무도 나가지를 않습니다
있는지 없는지
있거나 없거나 무방한지
그저 아무 곳에나 피었습니다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니 김천이 아스라이 보일 듯 하다.
이곳 우두령에서 발원한 감천은 수도산 계곡물, 부항 계곡물, 황악산 계곡물과 합쳐 흘러 김천의 젖줄이 되었으리라. 곡식과 사람, 온갖 생명있는 것들의 생명수로 천년을, 또 천년을, 이어 이어 왔으리라.
마치, 같은 고향 사람처럼, 감상에 젖어 있던 두 사람도, 하루의 여행길이 이렇게 맛깔스럽기는 처음이라며, 김천이라는 곳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고 연신 고마워했다.
이제, 서울로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아쉬운 걸음을 되돌려야 했다.
햇볕은 따가워도, 날씨가 맑아, 하늘은 가을처럼 푸르렀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김천에서 가보지 못한 곳 중에 명산이 하나 있는데, 그곳을 못 가봐 안타깝다고 하자, 분명 다시 올 테니, 다음에 꼭 가보잔다. 그 명산은 산등성이가 산 나무로 덮여 산등성이 길을 그늘 길로 걸어 갈 수 있는 전국 유일한 산이라 함부로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없으니, 다음에 오면 내 가르쳐 주리라 했다.
꼭 김천에 다시 오겠다며 두 분 손님은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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