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용) = 신문을 시작하고 기사와 관련된 전화를 자주 받는다. 평소 알고 지낸 사람도 있고 전혀 일면식이 없는 사람도 있다.기사에 대한 반응이 제각기 다른 시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해관계가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생각한다.
잘 알고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비판과 관련된 기사를 보고 “그런 기사를 쓰도 괜찮냐” 하는 식의 질문을 자주 한다. 기사로 인해 “손해를 보지 않느냐“ ”압력을 받지 않느냐“ 하는 걱정과 함께 신문사를 염려해준다. 그 사람들이 우려하는 대상이 정확히 어디고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문제인식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동안 지역소식에 소외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든 소시민들의 시선이 그렇다는 것이다.
신문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왜 기사를 읽고 그런 생각을 하는지 씁씁한 기분이 든다. 제대로 된 비판이야 신문의 생명과도 같은 것인데 오히려 비판기사가 게재된 것을 보고 신문사를 걱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지는 이렇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얽혀 있는 좁은 지역에서 굳이 서로 얼굴을 붉히는 기사를 다룰 필요가 있나 하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언론에 대한 인식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충분히 거론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럼 신문이 왜 필요하겠는가? 화보나 소식지를 발행하지 신문을 만들 필요는 없다.
신문은 사회구조의 모순을 지적하고 사회구성원의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며 건전한 여론을 형성해야 하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제대로 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신문으로서의 가치는 상실되는 것이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무엇보다도 언론을 보는 김천의 정서가 얼마나 편향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마음이 개운치 않다.
언론의 사회적인 역할과 책임에 대해 깊이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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