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 최근 모 인터넷 포탈사이트에서‘트로이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에 대한 조사를 벌인 결과, (아킬레스가 1위가 될거라는) 예상을 제치고 트로이의 첫째 왕자 헥토르(에릭 바나 분)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물론 헥토르 자체가 아주 멋진 인물이기는 하다.
“신을 섬기고, 내 여자를 아끼고, 조국을 위해”싸운다는 신념을 비장하고 강한 어조로 얘기하는 신에서 헥토르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은 관객이 과연 한명이라도 있었을까. 그러나 정말 그 뿐일까?
아무리 ‘내 여자를 아낀다’고는 해도 나라가 거꾸러질 운명을 예감하고 자기 가족들만 피신시킬 방법을 찾는 모습은 우리가 헥토르에게 기대했던 ‘노블리스 오블리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여자를 아끼는’ 헥토르의 사려 깊음에 감탄하고 더 나아가 헥토르의 아내와 아이, 더불어 그 가족들이 무사히 트로이성을 탈출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뭔가 이성적인 판단과는 거리가 먼, 눈 먼 자의 100% 전폭적인 지지가 아닐까?
관객들이 헥토르에 인정사정 없이 그리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소 무식해보일 정도의 선 굵은 근육질 몸매를 보여준 아킬레스와 함께 섰을 때 한없이 빈약해보이는 얇은 허벅지(물론 가슴 근육질은 우람했지만)와 좀 마른듯한 여리여리해보이는 신체조건부터 뭔가 동정심을 자아낸 것은 아닐까?
사실 반인반신인 아킬레스에 인간으로서 대항한다는 것 자체가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절대 해서는 안될 일이다.
더군다나 “한번 해볼 수 있어”가 아닌, “절대 이길 수 없음”을 감지하면서도, 자신이 맞닥뜨린 운명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그에게서 관객들은 진한 동지애를 느낀 것은 아닐까?
실제 우리 대부분은 능력이 출중한 아킬레스보다는 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헥토르에 가까운 사람들이니…
선악구도로 확연하게 갈라진 캐릭터도 한 몫 했다.
(여기서 원작은 완벽하게 훼손된다.)
헥토르와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로 대변되는 트로이 진영의 인물들은 늘 멋진 대사를 읊조리며 나타난다.
용감하게 조국과 가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하고(헥토르) 장남의 시체를 찾기 위해 장남을 죽인 아킬레스를 찾아가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아들의 시체를 돌려달라며 눈물을 흘리는 노인(프리아모스)을 보며 관객들의 가슴은 찢어진다.
둘 때문에 사랑에 빠져 나라와 국민을 위기에 몰아넣고, 용기라고는 눈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파리스까지 용서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아가멤논, 메넬라오스(헬레네의 원래 남편, 아가멤논의 동생, 스파르타의 왕), 오디세이가 주축인 그리스연합군 인물들은 추악하고 탐욕에 가득한 늙은이들거나, 눈치만 보는 유약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스연합군 중 유일하게 그나마 매력이 있는 캐릭터로 나오는 아킬레스 힘만으로는
트로이군에 치우치는 감정 곡선을 중간으로 가져가기 역부족이다.
영화에서 ‘권력’만 탐하는 야욕의 화신에, 음침한 욕심으로 가득찬 배 나온 추한 늙은이 쯤으로 묘사된 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 자신의 야욕을 위해 전쟁을 시작하고, 메넬라오스가 죽은 뒤 전쟁 명분이 사라졌음에도 전쟁을 그만두지 않은 채 트로이를 삼키려는 본 모습을 보인 아가멤논은 영화 속에서 반드시 죽어야 할 인물 쯤에 불과하다.
(그래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테니…)
과연 그런 인간이 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물론 원작에서도 아킬레스보다 좀 못하게 그려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가멤논도 나름대로 영웅이었다.
그런 인물이 ‘선악 구도’라는 논리에 밀려 허접한 늙은이쯤으로만 그려진 것은 상당한 아쉬움이다.
‘일리아드’’오디세이’라는 원작의 한 축을 이끄는 오디세이는 ‘약소국인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아가멤논 눈치나 보는 소심하고 유약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오디세이가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아킬레스가 “내가 존경하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대사에서 뿐이다.
영화만 봐서는 오디세이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트로이의 목마’라는 불세출의 전략을 세워 10년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인지를 알 수 있는 요소는 전혀 없다.
메넬라오스는 두말할 나위 없다.
정략결혼으로 헬레네를 묶어둔, 파리스와 헬레네의 아름다운 사랑을 방해하는, 가진 건 힘밖에 없는 늙은이.
사실 메넬라오스는 멀쩡히 잘 살던 부인을 파리스에게 빼앗긴 피해자이지만, 헬레네가 메넬라오스에게 돌아가야 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으리라.
(관객은 늘 추한 늙은이보다는 잘생긴 젊은이 편이다)
당연히 영화를 보는 내내 트로이군에 치우진 감정으로 영화를 볼 수 밖에 없다.
왕자의 위용이라고는 전혀 없는 비겁한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와의 결투에서 이기길 바라고, 결투에서 진 동생이 땅바닥을 기어와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이를 막기 위해 역시 명예 따윈 아랑곳않고 비정석적으로 칼을 들어 메넬라오스를 죽인 헥토르의 모습이 멋있기만 하다.
(사실 명예가 무슨 소용이랴만은…)
영화의 백미라는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결투에서도 반신반인인 아킬레스를 헥토르가 이길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고, 헥토르가 힘없이 무릎을 꿇는 순간 온 세상이 무너진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사실 아킬레스, 헥토르, 파리스, 아가멤논, 오디세이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이다.
이들 모두의 캐릭터가 제대로 살아났을 때 영화가 더 살지 않았을까 싶다.
헥토르만이 아닌, 모두의 캐릭터에 공감하고 모든 캐릭터가 지지를 받는 그런 영화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까?
어쨋든 ‘선악 구조가 뚜렷한 영화들’만 만들어내는 할리우드 풍토가 더더욱 아쉬운 영화였다.
물론 그래서 감정이입은 더 쉬웠겠지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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