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새벽, WTO 각료회의 개최 멕시코 칸쿤 현지서(서상현) = 고 이경해 전 회장이 자결 직전 바리케이트에 올라 ‘WTO가 농민들을 다 죽인다’ 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고 이 전 회장은 ‘나는 염려말라. 열심히 투쟁하라’ 는 유언을 남겼다.
“나는 염려말라.열심히 투쟁하라”마지막 유언
병원후송 2시간여만에 과다출혈로 운명
“무차별 개방이 초래한 사회적 타살” 비난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2대 회장과 전북도 의원을 지낸 이경해 전 회장이 세계무역기구(WTO) 5차 각료회의가 열리고 있는 멕시코 칸쿤에서 세계 농업을 말살하는 WTO 체제를 비판하며 자결,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 농민들에게 깊은 슬픔과 충격을 주고 있다.
농민들은 “이경해 농민열사의 죽음은 한국 및 전 세계 영세 가족농의 생존권을 말살하며 소수 다국적기업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WTO 체제와, 우리 정부의 무분별한 개방농정이 초래한 사회적 타살”이라며 “WTO 제5차 각료회의와 농업협상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특히 농민들은 “이경해 농민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노무현 정부는 멕시코 칸쿤에서 개최되는 WTO 각료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한국정부 협상단을 즉각 철수시키고, 농업보호, 식량주권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했다.
고 이 회장은 한국시간으로 11일 새벽, 멕시코 시간으로 10일 오후 1시경 ‘국제공동농민행동의 날’ 집회에서 “WTO가 농민들을 다 죽인다”고 외치며 한국 농민들의 최 선두에서 각료 회의가 열리고 있는 컨벤션센터로 진출을 시도하던 중 스스로 가슴을 찔러 자결했다.
이날 70여개 국가의 농민 1만여명은 오전 11시부터 칸쿤 중심지에 위치한 혁명광장에서 집회를 갖고 정오 경부터 각료회의가 열리고 있는 칸쿤 컨벤션센터로 진출을 시도했으며 이를 저지하는 멕시코 경찰과 심한 몸싸움을 펼쳤다.
특히 이날 한농연 농민대표단은 상여를 메고 시위대의 최선두에서 멕시코 경찰이 쳐 놓은 저지장벽을 뚫기 위한 싸움을 펼쳤으며 이 전 회장은 “WTO가 전체농민들을 다 죽인다(WTO kills, Farmers)”는 구호를 외치며 한국시위대를 진두지휘했다.
이후 이 전 회장은 12시 50분경(한국시각 새벽 2시50분경)에 서정의 한농연회장과 함께 2m50cm 높이의 저지장벽에 올라가 ‘Exclude agriculture from WTO/DDA negotiation(WTO/DDA농업협상에서 농업부분을 제외시켜라)’라는 현수막을 걸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미리 준비한 흉기(일명 맥가이브칼)를 꺼내 가슴을 찔렀다.
이 전 회장은 이후 칸쿤 시내 헤수스 로드리게스 종합병원으로 후송됐으나 현지시각 오후 3시 15분(병원측 발표시각)에 출혈이 심해 숨졌다.
이 전 회장의 죽음과 관련 WTO반대 투쟁단은 오후 5시경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사건에 대한 입장과 향후 일정을 밝혔다. 송남수 전국농민연대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경해 씨의 사망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면서 “WTO와 초국적 자본에 의한 한국경제의 침탈과 농업의 피폐화,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말살에 항의하기 위해 분명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울러 “우리는 그의 죽음에 대한 어떤 왜곡과 모략에도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면서 WTO와 한국정부에 대해 “현재 진행되는 WTO협상을 즉각 중단하고 한국정부는 지금 당장 WTO각료회의의 농업협상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라파엘 알레그리아 비아캄페시나(Via campesina, 농민의 길) 회장은 “이 전 회장의 죽음은 한국 농민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의 농민을 위한 것”이라면서 “각국의 농민단체들이 연대해 WTO 반대 투쟁을 펼치자”고 주장했다.
한국 농민대표단은 이날 병원에서 긴급회의를 갖고 서정의 한농연회장을 장례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 `세계 농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빈소는 농민대표단 숙소인 아쿠아마리나 호텔, 서울 한농연회관, 전북 장수군연합회 사무실, 멕시코 농민단체들이 마련한 칸쿤 시내중심가에 위치한 체육관에 각각 설치됐다.
한편 이날 시위에 참석한 전 세계 농민들은 이 전회장을 추모하는 뜻에서 밤늦게까지 촛불로 영문자 ‘LEE’라는 이경해 전회장의 영문 이니셜을 만든 후 ‘WTO반대’를 외치며 새벽까지 시위를 펼쳤다.
한농연 소속 농민 20여명은 병원 담벼락에 ‘우리농업 사수 한농연’이라고 적힌 한농연 깃발과 그 아래 이 전 회장이 시위때 머리에 두른 ‘WTO 반대’라고 적힌 머리띠와 ‘Exclude agriculture from WTO DDA negociation(WTO서 농업제외하라)’라고 적힌 현수막을 걸고 고인을 추모하는 시위를 벌였다.
허상만 농림부장관과 황두연 통상교섭본부장은 오후 6시경 ‘헤수스 구마테 호드리게스’ 종합병원을 찾아 서정의 한농연 회장을 면담하고 애도를 표했다. 또한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발표하고 “정부 대표단은 우리농업의 어려움과 농민들의 우려가 협상 결과에 반영되도록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면서 “멕시코 현지에 와 있는 우리 농민대표들은 냉정한 자세로 이번 회의의 진행을 지켜봐 줄 것”을 당부했다.
이후 오후 7시 30분 경에는 한나라당 주진우 의원(고령, 성주)과 민주당 정장선 의원(평택을)이 이곳을 찾아 애도를 표하고 농민단체대표들과 향후 대책 등에 대해 논의했다.
고 이 전 회장은 가슴을 찌르기 직전에 바로 뒤에서 시위를 펼치던 한농연 대표단에게 “나는 염려 말라. 열심히 투쟁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수첩에는 “몸은 먼저 가지만 정신은 지켜볼 것이다”라는 유서를 마지막으로 남겼다.
이와 관련,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와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농민연대·전국민중연대·WTO국민행동은 잇따라 기자회견과 성명 발표를 통해 “고 이경해 농민열사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노무현 정부는 WTO각료회의에 참석한 정부 협상단을 즉각 철수시키고, 그의 죽음을 계기로 농업포기정책 대신 농업을 살리고 식량주권을 지키는 쪽으로 농업정책방향을 전환시킬 것”을 촉구했다.
<이상길 기자, 칸쿤=서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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