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자는 밀양 출신, 미국 체류중” 고위간부 출신들 “등장인물 중 내가 아는 사람도 있다”(한길뉴스 한길뉴스 기자) = 김대중 정부의 최대의혹들이 잇달아 폭로되면서 퇴임하는 DJ를 궁지로 몰고 있다. 4,000억원 뒷거래설 의혹을 받아온 현대상선 4,000억원 불법대출금 중 2240억원이 국정원 편의로 북한에 전달됐다는 보도와 “노벨상 로비의혹이 사실이었다”라는 양심선언 형태의 폭로가 설연휴 직전인 1월 30일 새벽 연이어 터져나와 국민들을 분노와 충격 속으로 몰고 있다.
1월30일 새벽에 인터넷 게시판을 타고 급속히 퍼져나간 ‘자칭 국정원 직원 김기환’ 이라고 밝리며 ‘국민 여러분께 드립니다’라는 글속에서 김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기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뿌리며 로비공세를 펼쳤다고 주장했다.
김기환씨는 2차로 자신의 신상에 관련된 글을 올리고 자신의 신원을 밝혀와 이 양심선언문이 국정원 직원에 의해 작성됐으며 그 내용도 진실로 보인다는 게 정보관계자들의 판단이다.
김기환씨는 여러 게시판에서 자신의 신상이 잘못 알려지고 있다며 자신은 경상남도 모 시골에서 자랐고, 1984년에 서울법대에 입학해 1993년에 졸업, 9년 가까운 대학생활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1993년에 안기부에 입사하여, 그동안 대공정책실, 해외조사실(1국), 국제정책실, 비서실, 전략실 등 여러 부서에서 일하다, 2000년 10월 퇴사하였으며 간부출신이 아니라 일반직원이라며 자신의 신상과 관련된 내용을 정정했다.
또 이름은 김기환은 어릴 때 쓰던 이름으로 실명은 환자가 다른 이름이라는 것까지 밝혀와 이번의 경우는 지난번 대선 조작설과 같은 얼굴 없는 글이 아닌 실제 국정원 직원에 의한 양심선언으로 내용도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독립신문은 첫 양심선언문이 나왔을 때 ‘김기환씨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서울대 84학번이며 현재 미국에 있다는 초기단계 첩보를 입수했다. 이 첩보를 바탕으로 취재를 계속하던 중 때마침 김기환씨 본인이 ‘경남 모 시골 출신으로 서울대 84년 입학’이라고 밝혀와 이 양심선언문의 신빙성이 더 높아지게 됐다.
국정원은 이 일로 인해 망연자실 넋을 놓고 있는 분위기로 알려졌다. 이 글에 대한 질문을 받은 국정원 현직 직원들은 주변으로부터 쏟아지는 질문에 답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괴로운 표정만 짓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독립신문이 국정원관계자와 통화를 했을 때도 같은 상황이었다.
한 국정원 전직 간부출신은 독립신문의 취재에 “구체적인 사실은 말할 수 없지만 이 글에서 거론되고 있는 인명들 중 일부는 나와 국정원 동기거나 아는 사람”이라며 몇기 누구누구이며 이런 구체적인 글은 아무나 작문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노벨상 로비팀원과 같이 일했거나 지근 거리에 있었던 사람이 쓴 글로 보인다”고 평가를 했다.
또 다른 여러 명의 전직 국정원직원 및 간부들도 양심선언문 속의 아는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며 비슷한 답변을 했다. “작심을 하고 글을 쓴 것같다. 현직에 있는 후배들과 설날 인사를 하는 나누는 과정에 “대북지원금과 함께 노벨상 로비의혹까지 터져 매우 곤혹스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국정원이 계속 이런 일에 휘말려 안타깝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독립신문은 양심선언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청와대와 국정원에도 취재를 했다. 우리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선 청와대 부속실을 통해 양심선언문에 나오는 핵심로비책임자 김모씨와의 통화를 여러 차례 시도하면서 취재내용과 함께 전화번호를 남기기도 했지만 연락이 안됐다.
국정원 관계자에게도 사실여부 확인을 의뢰했지만 “확인을 해 줄 수 없다”는 공식적인 답변만 들었다. 양심선언문의 진위여부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관계자들이 입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만 그간 취재경험과 관례로 볼 때 양심선언문이 허위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또 국내 최대 정보원을 자랑하는 한 중견 언론인으로부터 확인한 결과 “양심선언문은 사실로 판단되며 이를 밝힌 사람은 현재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 들었다”며 이 글이 조작극이 아닌 실제 양심선언문인 것으로 평가를 했다.
국정원이나 청와대가 진실이 아닌 글이라면 절대 무반응이거나 확인불가로 대응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뒤에 진실로 밝혀진 사건에서도 우선 부인하고 보는 게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김기환씨가 밝힌 양심선언문은 현재 청와대 부속실에 있는 김모씨가 국정원 비서실 산하 대외협력보좌관으로 있을 때 DJ 노벨상 수상팀 로비를 실무지휘했으며 이를 위해 해외의 저명인사나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을 극비리에 한국에 초청, 남북이산가족 상봉장면을 지켜보게 하는 등 DJ의 치적을 집중 홍보, 스웨덴 한림원에서의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는 일을 해왔다고 적고 있다. 또 이를 위해 노벨상 수상팀의 책임자였던 김모씨는 해외에서의 DJ자서전 출간, 세미나 개최 및 DJ의 국제인권상 수상을 위해 각종 홍보를 책임진 인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양심선언자는 또 김씨가 DJ 노벨상 수상을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평하면서 그에 대한 이력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김씨는 DJ 공보비서 출신으로 이종찬 국정원장 시절 국정원에 몸담았다가 이 원장 퇴진과 함께 국정원을 떠나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를 잠시 거쳤다가 DJ노벨상 수상 공로로 청와대 부속실로 영전했다고 한다.
김씨에 대한 대통령 부부의 애정은 각별해 이 여사는 “내가 낳지는 않았지만 내 아들과 다름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는 게 이 글에 있는 김씨에 대한 설명의 개략적인 내용이다.
또 북한 남북정상회담 전 북한에 건네진 2,200억원의 몇십배에 해당하는 돈이 김정일에게 넘어갔으며 이는 노벨평화상 수상 협조대가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날 인터넷 화제는 단연 대북 현금지원과 국정원 간부 양심선언문이었다. 네티즌들은 현금지원이 여당 국회의원에 의해 확인됐다는 보도 때문인지 DJ 노벨상 로비에 천문학적인 돈이 뿌려졌고 이를 위해 김정일에게도 돈이 넘어갔다는 양심선언문 내용이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이들은 “DJ가 국민혈세로 남북정상회담을 돈으로 산 뒤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또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감사원장에게 “남북경협 차원에서 북한에 돈 준 것은 사법심사대상이 아니다” 라고 한 발언에 대해서도 분노의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정일에게 돈을 준 것이 어떻게 남북경협이냐”는 주장이다. “김정일이 이 돈으로 전투기와 탱크를 사는가 하면 한반도 최대 위협인 핵개발까지 하게 한 것 아니냐”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모습이다. 또 같은 여권인 노 당선자와 김 대통령 추종자들간의 논쟁까지 벌어지고 있어 대북뒷거래가 일으킨 풍파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이어 오후 들면서 외신까지 ‘돈으로 산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보도를 내보내자 “나라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며 이들의 불만은 폭발 일보 직전 상태가 됐다.
아무튼 설연휴 직전 터져 나온 현정부의 최대스캔들이 설연휴를 계속 달굴 전망이다.
신혜식/최두경 기자 king/ceditor@independent.co.kr
다음은 자신을 국정원 직원 출신이라는 김기환씨가 밝힌 DJ노벨상 로비설 관련 양심선언문 전문이다. 양심선언문 원문을 거의 손을 보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명예와 관련된 우려 때문에 여기에 거론된 사람들의 이름의 끝자는 X처리했음을 밝힙니다.
국민 여러분께 드립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가면 뒤에 가려진 김대중 정권의 잔악(醜惡)하고 위선(僞善)적인 본모습을 국민 여러분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지난 5년간, 김대중 정권이 민족(民族)과 역사(歷史) 앞에 저지른, 지울 수 없는 범죄행위(犯罪行爲)를 저의 양심을 걸고 여러분에게 밝힙니다.
김대중이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대북 정책을, 그토록 오랜 동안 일관되게 잘못 추진한’ 근본 이유는 노벨상에 대한 지독한 노욕(老慾) 때문이었습니다. 김대중은 노벨상을 수상할 목적으로, 국가정보원을 동원하여 해외 공작을 진행하는 한편, 북한의 김정일에게는 약 2조원에 달하는 뇌물을 제공하였습니다.
먼저, 김대중 정권이 국정원을 동원하여 벌인 노벨상 공작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김대중의 노벨상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지난번 최규선 게이트의 녹취록과 노벨상 공작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습니다. 최규선이 공개한 ‘블루카펫 프로젝트’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그 보고서가 실지로 거의 그대로 실행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규선과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을 전담한 김한X이라는 인물은 둘 다 유종근 전 지사와 가까운 사이로, 이미 이전에 함께 이 일을 추진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대중의 노골적인 노벨상 욕심은, 그의 첫 인사에서도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1998년 2월, 김대중은 초대 의전비서관으로 권영민 주 노르웨이 대사를 내정했다가, 일주일만에 교체하는 해프닝을 벌였습니다. 김대중은 노벨상을 겨냥하고 권영민 대사를 의전수석에 내정했으나, 그가 대사 재임중 DJ의 노벨상 수상을 방해한 사실이 확인되자 곧바로 낙마시킨 것입니다.
국정원이 노벨 평화상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국정원 해외조사국(1국) 동구과 북구팀의 주 임무는 노벨상에 관한 업무입니다. 문민정부 시절에도 YS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지만, 수상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에 DJ의 수상 저지에 주력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초대 국정원장이었던 이종찬씨는, 부임 초부터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 공작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지난번 일요신문에 밝힌 바와 같이, 이 원장은 YS 정권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활동했던 최종X 말레이시아 공사를 소환, 조사하였습니다. 최종X 공사는 지난 1995년, 노벨상 활동을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최모 주 노르웨이 대사를 소환 조치하기까지 했었던 인물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한국과 노르웨이는 한때 불편한 외교관계를 가지기도 했었습니다.
1998년 8월, 이종찬 원장은 비서실 산하에 대외협력보좌관이라는 부서를 신설하고, 김대중의 공보비서 출신인 김한X이라는 인물을 특별 채용하였습니다. 김한X은 이 원장에게 직보(直報)하면서 비밀리에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지난번 최규선 게이트에서 마이클 잭슨 공연 유치와 관련하여 국정원의 K박사로 거론되었던 자가 바로 김한X입니다.
그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초청, 휴전선에서 평화의 음악회 개최를 추진했는가 하면, 마이클 잭슨의 서울 공연에도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또한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민주 투사로서의 인생역정, 외환위기 극복 등을 홍보하기 위해 여러 책자를 발간하고 국제적인 세미나를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현지에서는 김대중의 인생역정을 미화(美化)한 김대중 전기(傳記)를 공금을 들여 북구어로 번역해 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국정원의 스웨덴 파견관 이병X(정규 11기) 참사는, 1999년 초 계급정년으로 옷을 벗게 되자 이러한 비리를 폭로하겠다며 소란을 부린 적도 있습니다. 그는 또한 김대중의 국제적인 신인도를 높이기 위해 넬슨 만델라를 방한 초청하려 했으나, 만델라가 거액을 요구하는 바람에 불발로 그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99년 초, 북구와 유럽에 출장을 갔다오기도 하는 등 정열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국정원에서의 그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중단되었습니다. 1999년 5월 말, 이종찬 원장이 갑자기 옷을 벗었기 때문입니다.
후임 천용택 원장은 어떤 연유인지, 김한X의 노벨상 공작 활동에 거부감을 표시하면서, 부임 일주일만에 김한X을 퇴사시켰습니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로 돌아간 김한X은 사업을 계속 진행한 결과, 1999년 7월, 김대중에게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안겼습니다. 그리고 약 5개월 후, 김한X은 1999년 12월,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파격적으로 영전되어 현재까지 김대중을 최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김한정이란 인물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는 김대중의 최측근 심복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KINDS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여, 몇 가지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일보 2002년 8. 26일 기사에 의하면, 김한X은 김홍업에게 면회를 가서 필요한 물품을 전달해 준다고 합니다. 한국일보 2002. 2. 25자 기사에 의하면, 김한X은 한화갑 고문에게 전화를 걸어 박지원 특보의 재기용에 대해 설명했다고 합니다. 중앙일보 2002. 1. 25자 기사에 의하면, 김한X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자유롭게 의사를 개진하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월간중앙 2000. 3월호 기사에 의하면, 박지원씨가 박선숙 공보비서와 함께, 김한X을 가장 아낀다고 합니다. 이희호는 김한X을 가르켜 “내 배에서 안 나았지만, 내 아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각별한 신임을 표시한다고 합니다.
김한X은 경남 마산(창원)출신으로, 서울의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대학 재학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적이 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1992년 대선까지 김대중의 공보비서로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계속해서, 2000년도에 김한X이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재임하면서 벌인 노벨상 공작의 주요 내용을 설명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한정은 박경태 주 노르웨이 대사, 김남X 주 노르웨이 국정원 파견관, 그리고 국정원 1국 동구과 북구팀 박노X 팀장에게 직접 지시하면서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김한정은 이 공작의 일환으로 노벨위 부위원장이자 5인 심사위원회의 일원인 노르웨이의 스톨셋 주교를 비밀리에 방한 초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스톨셋 주교는 김대중의 노벨상 시상식에서 안내를 맡은 사람입니다.
또한 김한X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동티모르의 라모스 호르타 주교에게 거액을 제공하고 김대중의 노벨상 추천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라모스 호르타 주교는 김대중의 노벨상 시상식에 초대된 사람입니다. 김대중이 그동안 동티모르에 경제적인 지원과 더불어 상록수 부대를 파견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표시한 연유도 노벨상을 받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한 것입니다.
한편, 김한X은 노르웨이와 남아공에 해외 홍보관을 신설, 파견하여 현지에서 해외홍보 주력하기도 했습니다. 노르웨이에 홍보관을 파견한 이유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일터이지만, 남아공에 홍보관을 신설한 이유는 만델라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5년간, 이 정권이 “홍보공화국”이라고 비아냥을 받을 정도로 해외 홍보에 치중한 이유도 바로 노벨상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 2000년 8월, 김한X은 노벨상 결정에 막후 영향력이 있는 보네비크 노르웨이 전 총리와 저명 음악인 등 3명을 극비리에 방한 초청하였습니다. 이들 노르웨이 총리 일행은 국정원 담당 직원에 의해, 비밀리에 제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으로 안내되었습니다. 그들은 감격적인 남북 이산가족 상봉장면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목격하고, 김대중을 예방한 후 노르웨이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이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노르웨이의 인권상인 라프토상 수상 결정이 났고, 이어서 노벨상 수상 결정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보네비크 전 총리는 지난 2002년 1월, 두 번째로 노르웨이 총리가 된 후, 또 다시 방한하여 김대중의 극진한 환대를 받은 바 있습니다.
김한정의 이러한 공작활동을 보조한 자로 조준X란 인물도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전 헌법재판관 조승형의 조카로, 김한X과 같은 시기에 이종찬 원장에 의해 특별 채용되어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함께 근무했습니다. 그는 김한X의 노벨상 공작을 보조하다, 2000년 8월 국정원을 퇴사하였으며, 현재는 아시아나 항공사에서 부기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2001년까지 김한X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청와대를 자주 사칭하다가 경찰청 조사과(사직동팀)의 내사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국정원에서 노벨상 공작은 흔히 “S”공작으로 일컬어졌는데,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동구과 박노X 팀장과 김남X 노르웨이 파견관이 실무를 맡았습니다. 이러한 공작은 해외조사국(1국)의 최조X 국장(정규 6기, 외대)과, 이영X 국장(정규 9기, 육사 26기) 재임 기간 중에 주로 이루어 졌습니다.
공작을 지휘했던 최조X 국장과 이영X 국장은 그 후 각각 주 쿠웨이트 대사와 핀란드 대사로 영전되어 나갔습니다. 이영X 대사는 2001년 4월, 1국장에 부임한 지 8개월만에 해임되었기에, 특히 입을 막아야 할 필요가 더 컸을 지도 모릅니다. 참고로, YS 정권에서 안기부 출신이 대사로 영전되어 나간 것은 이병X 차장이 전 말레이시아 대사로 나간 것이 유일한 예입니다. 박노X 팀장(정규 17기)은 그 후 선배들을 제치고 선두주자로 동구과장으로 승진하였고, 현재는 서구과장으로 재임하고 있습니다.
지난 1998년, 김한X은 미국 뉴저지주의 럿거스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귀국할 당시 전세집도 구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이종찬 원장은 그를 국정원의 安家 아파트에서 살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너무나 이례적인 특별한 대우였습니다. 지금 김한X은 집을 몇 채나 장만했을 뿐만 아니라, 100억대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청와대의 모든 돈줄을 그가 쥐고 있다고도 합니다.
이어서 김대중이 노벨상을 수상할 목적으로 저지른 민족에 대한 반역 행위를 계속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하의 내용은, 제가 신뢰할 수 있는 출처로부터 얻은 정보에 근거한 것이지만, 사실 여부를 모두 검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혀 둡니다.)
지난 1999년, 외환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한 김대중은 자신의 업적과 경륜을 해외에 적극 홍보하면서 노벨상 수상 분위기 조성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1999년 7월, 김대중은 수상자 11명 가운데 6명이 노벨상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진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손에 넣으면서 본격적으로 노벨상 사냥에 나섰습니다. 김대중은 이제 남북관계에 어떤 획기적인 돌파구만 마련할 수 있다면, 노벨상을 목에 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입니다. 김대중과 김정일간의 은밀한 뇌물 뒷거래는 이러한 배경 아래 이루어 졌습니다.
지난 1999년 말, 온 세상이 새 천년의 기대에 한창 들떠 있을 즈음, 김대중과 김정일은 극비리에 뇌물 뒷거래 협상을 마무리지었습니다. 김대중이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뒷돈의 규모는 미화(美貨)로 15억 불입니다. 인류가 뇌물이라는 개념을 발견한 이후 최고의 뇌물 액수이자, 앞으로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기록일 것입니다.
현대에서 이 뒷돈을 대었습니다. 지난 번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제기한 현대상선의 4,000억 원은 이 돈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현대상선 대출금 일부가 정상회담 선금(先金)으로 건너갔고, 대부분의 뇌물 잔금은 2000년 9월에서 12월 사이에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난 2000년 3월과 6월에 벌어졌던 현대의 왕자의 난은, 정주영이 이 돈을 대기 위해 그룹 전체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시도였을 것입니다.
이 돈은 1,000만원권 수표 형태로 국정원에 넘겨졌고, 국정원은 주로 외교행낭을 이용하여 독일·프랑스 등 6개 지부를 통해 이돈을 해외로 빼돌렸습니다. 행낭의 책임자는 처음에는 최조X 1국장이었다가, 2000년 9월경부터는 박경X 단장으로 바뀌었고, 실무자는 고강X 사무관이었습니다. 박경X 단장(11기, 목포 문태고)은 2001년 4월, 이 정권에서 최단기간 내에 국장으로 승진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던 인물입니다.
박지원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는 그는, 국장이 된지 2년이 다 되가는 지금도 승진필요 최소 연한을 채우지 못해 2급으로 있다고 합니다. 박국장의 이례적인 승진은 당시 시사저널에 기사화 되기도 했습니다. 고강X 사무관(목포 문태고)도 그 후 팀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행낭 담당자가 승진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해외로 빠져나간 이 돈은 현지에서 주로 유로화로 환전되어 북쪽으로 전달되고, 이 수표는 다시 국내로 반입되어 국내에서 현금화되었다고 합니다. 해외에서 유로화로 환전하는 일과, 수표를 재반입하는 작업에는 우리나라의 유로화 책임자가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유로화 책임자는 한국계 유럽(프랑스 ?) 국적을 가진 40대의 여인으로, 하이얏트 호텔에서 장기 투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김대중, 정주영, 김정일이 직접 관여했을 것이며, 이들은 각각 김한정, 김정남, 정몽헌을 대리인으로 내세웠을 것입니다. 박지원, 임동원, 이기호 등 지금까지 김대중 옆을 지키고 있는 인사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청와대를 떠났다가도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김대중은 대북 커넥션에 관련이 있는 인사는 배신하지 못하도록 끝까지 그의 주위에 묶어두고 있는 것입니다.
김대중의 분신(分身)인 김한X 제1부속실장과 김정일의 아들인 김정남은 이 일을 협의하기 위해 일본 등지에서 여러 차례 극비 접촉을 하였을 것입니다. 김한X과 김정남은 2000년 4월 10일 경, 남북정상회담 발표를 전후하여 일본에서 만나 남북 뒷거래 협상을 최종 마무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이들은 2000년 10월과 12월, 노벨상 수상을 전후하여 일본에서 만나, 노벨상 단독 수상 문제 등을 협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난 2001년 5월 초, 김정남이 일본에 밀입국하다 체포되었을 당시에도, 김한X과 김정남은 일본에서 접촉하기로 약속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00년 들어, 김대중과 김정일은 뒷돈 거래 협상을 대충 일단락 지으면서, 각본대로 본격적인 국내외 분위기 조성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김대중은 1999년 12월 말, 부임한 지 6개월 밖에 안된 천용택을 경질하고, 임동원을 국정원장 자리에 앉혔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당시 천용택은 자기 부인(김아미)이 옷로비 사건에 연루된 것을 무마시키려고 검찰 출입기자 몇 명을 국정원에 초대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DJ의 대선자금 등 민감한 정보를 누설하는 촌극을 벌인 데다, DJ를 “김대중이가…”라고 부른 게 일주일 후에 밝혀져 불경죄(不敬罪)로 잘린 것입니다. 천용택은 제가 겪어 본 국정원장 중 가장 자질이 저열한 자였습니다. 그는 김대업 의인(義人)(?)에게 5억 원을 주고 매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0년 1월, 김대중은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고, 총선 후 제1당이 되고 나면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겠다고 처음으로 운을 떼었습니다. 2000년 2월, 김대중은 일본 도쿄방송(TBS)과의 특별 인터뷰에서 김정일을 “식견(識見) 있는 지도자”라고 치켜세워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했습니다. 2000년 3월, 독일 방문한 자리에서는 대규모의 대북 경제지원을 주 내용으로 하는 충격적인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당시 이러한 발표는 미국과 사전교감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클린턴 대통령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결렬한 분노를 샀었습니다.
이러한 국·내외 분위기 조성 작업과 함께, 김대중과 김정일은 2000년 1월부터 중국 등지에서 남·북간 비밀회담을 추진하였습니다. 남쪽에서는 임동원 국정원장이 회담을 주도했고, 김보X 전략국장이 실무를 맡았으며, 서X 경협1과장이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김보X 전략국장과 서X 과장은 남북정상회담 후, 각각 신설된 3차장과 남북회담조정관(이사관)으로 승진하여 지금도 현직에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김용순 대남비서가 주도하고, 임동옥(춘길) 아태 제1부위원장이 실무를 맡고, 권민(호웅) 참사가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남북은 각각 박지원과 송호경을 얼굴마담으로 기용하였습니다. 지난 2000년 4·13 총선 직전, 김대중은 극적으로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했습니다. 당초 남북은 일요일 오후에 발표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김대중은 홍보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월요일 아침으로 발표시점을 늦추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정권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의도는 자명합니다. 단기적으로는 4·13 총선에서 민주당을 제 1당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고, 중기적으로는 노벨 평화상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장기적으로는 대북 관계 개선을 지렛대로 삼아 호남당의 한계를 탈피하고, 궁극적으로는 정계개편을 획책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단기와 장기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노벨 평화상을 받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회칠한 가면 뒤에 숨겨진, 인자한 김대중의 악마적인 모습에 대해 믿지 않으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적과 싸우기 위한 전략물자를 수송해야 할 국정원의 행낭이 적의 군자금을 보급하는 통로로 이용되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우실 줄 압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김정일은 김대중의 뇌물을 받아, 고폭(高爆)장치 등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핵심 물자를 파기스탄, 카자흐스탄, 프랑스 등지에서 구입했습니다. 김정일은 또한 이 돈으로 카자흐로부터 40대의 신예 미그기를 도입하였고, 러시아로부터 잠수함과 탱크 등 첨단무기를 구입하였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지난 서해교전시 장열하게 전사한 우리 해군 장병들의 명복을 빕니다.)
최근 벌어진 몇 가지 일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북한이 작년부터 달러화 유통을 금지시키고, 유로화로 결제수단을 변경할 수 있었던 것도 뇌물로 받은 유로화 덕택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북한은 그동안 약세를 면치 못하던 유로화에 대해(2000. 8월, 30%절하) 우리보다도 훨씬 더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 왔습니다. 2000년도에 북한에 넘겨진 15억불 상당의 유로화는, 지금 현재의 환율로는 20억불 가치로 평가 절상되어 있습니다.
최근 현대에 지원한 34조 원의 공적자금 중에서, 현재 2조원이 회수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합니다. 현대상선은 주력 알짜배기 업종인 자동차 운반선 사업을 15억불에 매각하였습니다. 김대중이 북한에 송금하기로 한 금액과 이러한 액수가 일치하는 것을 그냥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김대중은 국민의 혈세(血稅)로 이루어진 공적자금을 현대에 지원하면서 현대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챙긴 것입니다. 김대중은 리베이트의 일부를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었겠지만, 상당부분을 북한에 뇌물(賂物)로 바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현대는 정부로부터 공적자금을 받아 북한에 지원하고, 북한으로부터 금강산과 개성공단 독점사업권을 대가(代價)로 받은 것입니다. 북한은 현금을 받아 챙기고 위장평화 생색을 내줌으로써, 김대중이 노벨상을 받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북한의 대남 일꾼들이 한결같이 “현대는 절대로 망하게 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있는 배경에는 이러한 커넥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이 대마불사(大馬不死) 대우그룹을 해체한 것과, 김정일이 “김우중이 가장 악질적이다”라고 언급한 것은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북한의 소위 대화일꾼들이 우리의 경제원조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가 더 많이 주었다.”고 강변하는 이유도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김대중이 목에 건 자랑스런 노벨상은 실로 북한 동포들의 피눈물과 절규, 그리고 우리 국민들의 혈세(血稅)가 어루러져 응결된 결정체(結晶體)인 것입니다. 지금 김대중은 잔설(殘雪)같이 남아 있는 권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과거 추악한 범죄흔적을 지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잠시 속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는 지난 2년여간 찬바람 부는 현실 속에서 어렵게나마 국가정보원 직원의 명예를 걸고 외롭게 이러한 일들을 추적하여 왔습니다. 비록 저는 이 모든 일들을 모두 검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지만, 제가 얻은 정보가 진실(眞實)에 가깝다고 확신합니다. 예전에 어느 분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깨어 있는 민족이라야 자유(自由)와 번영(繁榮)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실체적(實體的) 진실(眞實)을 확인하는 작업은 국민 여러분들께 맡깁니다.
감사합니다.
2003년 2월, 전직 안기부 직원 김기환 드림
정보공개에 부쳐,
사랑하는 國家情報院 동료, 선·후배 여러분!
저는 오늘 전직 직원으로서, 우리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保安을 위배하는 일을 저지르기로 결심했습니다. 保安을 지키는 일보다는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더욱 우선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2년여 전, 회사를 나온 저는 이 정권의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기 위해 혼자서 많은 煩悶의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제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사실들을 알아 낼 수 있었고, 이제 국민들과 함께 이 정보를 공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저의 결심에 대해 여러분의 이해를 구합니다.
國家情報院 동료, 선·후배 여러분,
저는 지난 5년간 여러분들이 당한, 그리고 앞으로 5년간 더 당할지도 모를, 말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을 너무나도 잘 이해합니다. 2년여 전, 저는 “무릎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며 퇴사를 결심했지만, 그러한 선택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신이 없습니다.
저는 비통한 마음을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인고의 세월을 참고 온 보람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민족의 운명은 여러분들의 어깨 위에 달려 있습니다. 용기를 가지시고 끝까지 살아남아 민족의 반역자들을 처단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이 글로 인해 실명이 거론된 분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염치없지만 양해 있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2차 발표/ 김기환은 이런 사람
저는 오늘 글을 올렸던 전직 국정원 직원입니다.
여러 게시판에서 저에 대해서 잘못된 정보가 올라왔기에 정정드립니다.
제가 저의 신원을 정확히 밝히지 않아 초래된 일인지라 사과부터 드립니다.
실명은 사실 제가 국정원에서 사용하던 가명입니다. 저의 본명은 끝글자가 다릅니다.
저의 가명은 제가 어릴 때 불리우던 이름입니다.
저는 경상남도 모 시골에서 자랐고, 1984년도에 서울법대에 진학하여,
1993년도에 졸업했습니다. 학교를 오래 다닌 건 공부를 잘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1993년도에 안기부에 입사하여, 그동안 대공정책실, 해외조사실(1국), 국제정책실, 비서실, 전략실 등
국정원의 여러 부서에서 일하다, 2000년 10월 퇴사하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국정원 간부출신이 아니라 그냥 일반 직원이었습니다.
제가 글을 발표한 이유는, 이미 밝혔듯이, 국민들에게 정확한 판단자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도 제가 쓴 내용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아마도 역사는 진리를 비껴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현명하신 판단을 다시 한 번 촉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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